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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 전기의병운동은 19세기말 재야지식인이었던 유생들이 주동되어 봉기되었던 민족운동 이다. 이들은 대부분 북한강유역인 경기도 양근(楊根) 벽계리(蘗溪里; 현 경기도 양평군 서종 면 노문리 벽계마을)의 화서 이항로(華西 李恒老, 1792∼1868) 문인으로서 자신들이 배운 의 리론과 위정척사론을 실천에 옮겨 자문화·자민족·자국가를 수호하기 위한 항일투쟁으로 전개 하였던 의병운동이었다.
춘천지역의 전기 의병운동은 1895년 8월 20일 민황후(閔皇后)가 일제에 의해 시해된 을미 사변이 조선인의 분노를 폭발시키면서 시작되었다. 그러므로 관료들은 국모의 원수를 갚아 야 한다는 상소를 올렸으며, 서울을 비롯하여 춘천·강릉·충주·안동·진주·나주·해주 등지에서는 '국수회복(國讐報復)'을 기치로 한 항일의병이 거세게 일어났다. 그리고 같은 해 11월 15일 (음력)에 성년남자의 머리 위에 튼 상투를 자르는 단발령이 공포되자 의병투쟁은 전국적으 로 확대되었다.
이와 같이 1895년 8월 이후 시작되어 1896년 10월경까지 유생층이 중심이 되어 반침략·반 개화 투쟁을 전개한 시기에 춘천지역에서도 화서학통을 이은 유중교(柳重敎)·유인석(柳麟錫)· 유중악(柳重岳)·유홍석(柳弘錫)·유봉석(柳鳳錫)·이소응(李昭應)·이진응(李晉應) 등 위정척사론자 들이 집중적으로 거주하고 있어 의병봉기의 분위기는 어느 곳보다도 더욱 성숙되어 있어 춘 추대의와 복수토적의 명분을 내걸고 살신성인(殺身成仁)·사생취의(捨生取義)를 도덕주체로서 실천의 길을 택하여 1896년 1월(음력 1895년 11월·12월)에 춘천유생을 중심으로 군인·상인·포 군 등 400여명이 춘천관찰부를 습격, 점령하면서 춘천의병이 시작되었다.
이들은 먼저 단발한 초관(哨官) 박진희(朴晉熙)를 처형하고 전 춘천유수인 탐관오리 민두 호(閔斗鎬)의 생사당(生祠堂)을 파괴한 후 춘천의 진산인 봉의산에 진영을 설치하였다. 이어 인근의 농민과 보부상들을 의진에 참여하여 춘천의병은 확대되었으며, 1월 20일(음력 1895년 12월 6일)에 당시 명망이 높은 이소응을 대장으로 추대하였다. 춘천의병은 신임관찰사(新任觀察使) 겸 선유사(宣諭使)인 조인승(曺寅承)을 가평에서 체포하여 처단하고 서울로 향하여 진격하였다. 그러나 가평 벌업산에서 관군과의 전투에서 패하고 말았다. 춘천의병대장 이소 응은 그의 종형 이진응과 종제 이만응(李晩應)·이경응(李景應)에게 의진을 위임한 후 지평을 거쳐 제천 유인석 의진에 합류하였다. 그후 이진응은 전사하였고 이경응은 강릉의병 민용호 (閔龍鎬) 의진에 합류하여 항일의병활동을 계속하였다.
춘천지역 후기 의병항쟁의 봉기원인은 1907년 7월 고종퇴위 사건과 순종즉위 직후 한·일 신협약(정미7조약) 체결, 그리고 군대해산이었다. 일본은 을사조약의 무효를 주장하는 고종 황제를 강제로 퇴위시키고 황태자인 순종을 즉위케 하였으며, 연호를 융희(隆熙)라고 고쳤다. 고종황제의 퇴위는 국민을 더욱 흥분시켜 연일 시위운동이 일어나고 일본인이 도처에서 습 격을 당하였다.

한·일신협약은 국가의 법령제정, 중요 행정처분, 고등관리의 임명에 대한 사전 승인을 통 감으로부터 받도록 하였고, 통감이 추천한 일본인을 관리로 임명하도록 하였다. 나라의 외교 와 내정간섭을 강탈한 일본은 대한제국의 기간부대였던 서울의 시위대(侍衛隊)와 지방의 진 위대(鎭衛隊) 군인들은 군대해산에 반대하여 일본군과 시가전을 벌이기도 하였으나 무기가 떨어지자 지방의 의병부대에 합류하였다. 그 중에서도 원주진위대의 항일투쟁이 가장 치열 하였다. 김덕제(金德濟)와 민긍호(閔肯鎬)가 이끈 원주진위대의 군인들은 근대적인 무기로 무장하고 원주·충주·여주·평창·강릉·장호원 등 강원·경기·충북지방에서 여러 차례 일본군을 격 파하여 타격을 주었다.
1907년 춘천의 후기의병은 고종의 퇴위사건을 계기로 야기되어 한·일신협약(정미7조약)의 늑결과 군대해산이 강행되자 유홍석을 중심으로 재기하였다. 1896년 1월 춘천의병의 이소응 과 함께 북한강유역 가평과 청평천 일대에서 선전하였던 유홍석은 춘천의진이 상실하게 되 자 제천 유인석의진으로 합세하여 제천의진의 군무를 주재하였고 「국조(國朝)의 세덕(世德) 을 밝힘」·「왜추(倭酋)의 심적(心跡)을 밝힘」 등 '고병정가사(告兵丁歌辭; 動産文化財)' 210 여 편을 지어 의병활동을 진작시키는데 힘썼다.
1905년 11월 을사5조약이 일제의 불법적으로 맺은 결과, 1907년 7월 고종 퇴위사건과 한· 일신협약 그리고 8월의 군대해산 등이 강행되자 북한강유역 상류인 홍천에서 박장호(朴長浩)와 양평·가평의 의병장 김노수(金魯洙) 등이 기병하였으며, 춘천의 유홍석은 진위대 해산 직후 유중악 등과 모의하고 발산리 항골(恒谷)에서 유하석(柳夏錫)·유봉석(柳鳳錫)·유태석(柳台錫)·유영석(柳寧錫)·유제곤(柳濟坤)·박선명(朴善明)·박화지(朴華芝)·최영석(崔永錫)·김정삼(金正三)·길희정(吉熙貞) 등과 더불어 의병 600여명을 모집하여 춘천 진병산(陣兵山), 가평 주길 리(珠吉里) 등지에서 일본군과 치열한 혈전을 벌였다. 이 전투에서 유홍석은 부상당하고 9월 26일(음 8. 19) 유하석·유영석 등이 전사하는 등 패전하였다.
그러나 이때 군자금과 탄약, 군량이 부족하자 유중악은 제일먼저 농우(農牛)를 내놓았고,1) 춘천의병진영의 윤희순 여성의병장은 화·중·성·의문의 고흥유씨(高興柳氏) 아내와 춘천지역 향촌민의 아내들로부터 군자금을 모아 춘천시 남면 가정리 여의내골에서 놋쇠와 구리 등을 구입하여 무기와 탄약을 제조 공급하였으며, 의병훈련에도 협조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춘천의병은 관군에 비하여 장비가 너무나도 열세하여 가평 주길리 전 투에서 패하자, 유홍석 의병장은 잔여의병을 정비하여 김노수 의진에 맡기고 자신은 부득이 제천 장담리에 머물면서 다시 재기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각처의 의병이 이미 흩어져 있었 으므로 끝내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춘천의병의 항일구국전쟁은 멀리는 왜란·호란 때의 반일·반청 의병에서부터 시작하여 개항 전후시기에는 위정척사운동으로 이어져 왔으며, 그것이 명성황후 시해사건으로 다시금 반일 의병으로 나타나고 을사조약과 군대해산을 거치면서 한층 대규모 항일전쟁으로 발전해 온 것이다. 그 과정에서 참가 주도층도 양반 유학자에서 점차 평민출신으로 바뀌어 갔으며, 유 교적 충효사상에서 근대국가의 주권옹호를 위한 독립전쟁의 형태로 변화 발전되어 갔던 것 이다. 그리고 이 흐름이 일제시대의 항일무장투쟁으로 이어지면서 가장 적극적인 항일운동 으로 이끌어 가게 되었다.



1. 의병의 개념

의병이란 맥켄지가 그의 저서 「The Fight For Freedom」에서 'Righteous Army'라고 표현하고 있듯이 '정의(正義)를 위해 일어난 군대'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한말의병은 박은 식(朴殷植)의 저서 『한국독립운동지혈사(韓國獨立運動之血史)』에서 "의병이란 민군(民軍)이 다. 국가가 위급할 때 즉각 의(義)로서 일어나 조정의 징발령을 기다리지 않고 종군하여 분 연히 대적하는 자"라고 정의를 내리고 있다. 여기에서 의병은 민군으로 '적개(敵愾)' 즉 군주 의 원한을 풀고자 하는 '충의군(忠義軍)'임을 알 수 있다. 즉 한말의병은 정의심과 충의정 신에 입각하여 개화정권을 극복하고자 하였으며, 동시에 일본이라는 외세를 구축하여 국권 을 수호하고자 반침략 구국항쟁을 전개한 민족운동이라고 할 것이다.
이와 같이 의병이란 충군적(忠君的)이고 근왕적(勤王的)이라는 고유의 성격을 내포한 "의 리론(義理論)과 오상정신(五常精神)을 주요 이념으로 하고 자발적으로 무장 항쟁하여 외적의 침략에 대항한 민군"이라고 정의할 수 있겠다.

2. 의병의 시기구분

시기구분을 하는 것은 역사를 체계적으로 인식하고 이해하려 방법론의 하나이다. 따라서 역사연구를 위해서 시기구분은 반드시 불가결한 필수 조건이며 목표이기도 하다. 한말의병 운동사에 있어서 체계화를 위한 시기구분은 여러 갈래로 시도되어 왔다. 대체적으로 3시기 구분법인 을미의병·을사의병·정미의병과 같이 간지로 호칭되어 통용되었으나 1974년 4시기구 분법3)이 제기되기도 하였으며, 그 후 4단계설을 보완하여 5시기구분법이 제의되었고, 다시 4시기 8단계로 세분화하기도 하였다.
다시 최근 연구성과에 의해 의병의 하한을 3·1운동과 연결하고자 시도한 9단계설에서 말 기의병의 해당기간을 재차 수정하고 있으나,4) 한말의병사는 단순한 시간의 인접여부나 의병 봉기의 계기만을 기준삼아 구분할 것이 아니라 적어도 의병의 지도이념, 조직성분과 성격, 의병의 활동상황, 의병의 수습대책 등 일련의 체계적 인식에서 규명되고 천착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춘천의병의 시기구분은 대체적으로 춘천지역에서 의병활동이 시작되어 항일투쟁 으로 활발히 전개되었던 전기의병과 후기의병만을 적용하여 시기구분 하였다. 전기의병은 1895년 12월부터 1896년 10월까지로 을미의병시기를 구분하고, 후기의병으로는 1907년 8월 부터 1909년 10월까지로 정미의병에 해당되는 시기이다.



1. 정치적 배경

전기 춘천의병의 정치적 배경은 1884년 10월 갑신정변의 실패로 조선에서 개화파의 실각 을 가져왔으므로 일본정부는 이 사건을 계기로 조선에 대한 청의 간섭을 배제하기 위한 적 극적인 침략정책을 추진하였다. 이런 정치적 배경하에서 1894년 동학농민전쟁이 발발하였고 조선정부는 그 진압을 위하여 청에 군사를 요청하기에 이르렀다. 일본은 조선을 무력으로 침략하기 위한 절호의 기회로 삼고 대병력을 출동시켜 '일본공사 관 및 거류민 보호'라는 구실로 내세워 조선에 군대를 주둔시켰다. 이는 청의 세력을 조선 에서 물리치고 나아가 조선을 대륙침략의 전진기지로 확보하려는 정책이었다. 이들은 서울 에 위협적인 군대를 주둔시켜 놓고 1894년 5월 중순 이후 조선정부에 내정개혁을 제의하였 다.
그러나 조선정부는 내정간섭이라 하여 거절하고 일본군의 철수까지 요구하였다. 그리고 조선이 독자적으로 정치개혁을 추진할 것을 밝히자 일제는 큰 도전으로 받아들였다. 이러한 일제는 먼저 6월 21일 새벽 5시경에 경복궁을 무력으로 침범하여 갑오변란(甲午變亂)을 일 으켰다. 경복궁을 무력 점거한 일제는 자신들의 무력행사를 은폐하기 위하여 대원군(大院君) 을 유인하여 입궐시켰다.
대원군의 등장은 곧 민씨정권의 몰락을 의미하였다. 명성황후(明成皇后)를 비롯하여 민영 준(閔泳駿)·민영소(閔泳韶) 등 민씨일가는 궁을 빠져나가 대피하였다. 일제는 다음날인 6월 22일부터 일제는 고종으로 하여금 정무와 군무를 임시로 대원군에게 위임토록 조치하였다. 이는 고종의 권한을 박탈하고 민씨정권을 타도하여 친일적인 조선정부를 수립하려는 의도에 서였다. 갑오변란은 일제가 추진한 조선 식민지화의 서곡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처럼 갑오 변란은 조선과 동아시아의 세력판도에 큰 변화를 초래한 대사건 이라고 할 수 있다.
춘천지역을 비롯한 재야의 위정척사 유생들은 갑오변란(甲午變亂)을 침략행위로 단정, 곧 반침략투쟁을 개시하였으며, 갑오변란 직후에 조직된 김홍집 내각을 친일내각이라고 비판하 고 배척하였다. 갑오변란은 위정척사 유생들에게 국가와 민족의 위기의식을 느끼게 하여 반 개화·반침략의 의병을 봉기하게 만들었던 요인 중에 하나였다.5)
1895년 8월 20일 명성황후가 일제에 의해 시해된 을미사변이 발생하였다. 일제는 갑오변 란 이후 조선을 장악하고 개화를 구실로 한 침략정책을 수행 중 삼국간섭을 계기로 조선에 서의 우월권이 러시아에 의해 저지 당하였다. 따라서 조선지배정책에 타격을 입게 된 일제 는 친러정책의 핵심인물인 명성황후를 제거하고자 한 것이다. 이는 국제적 범죄행위로 조선 을 식민지화하려는 침략행위의 일환으로 취해진 것이 분명하다.
이와 같이 을미사변 직후부터 서울을 비롯하여 삼아 춘천·원주·강릉·안동·구월산 등 각지 에서 방(榜)과 격문(檄文) 또는 고시문이 전파되어 곳곳에 붙으면서 '거의토적(擧義討賊)'과 '국수보복(國讐報復)'을 기치로 의병투쟁의 직접적인 계기가 되어 봉기되었다.


2. 사회적 배경

조선말 의복제도 개정은 위정척사 유생들의 주체적인 문화인식에 충격을 가져와 반일의병 의 봉기에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화서 이항로의 고제자인 성재 유중교(省齋 柳重敎) 는 화서학파의 독특한 위정척사·존화양이론의 기반 위에서 갑신변복령을 맹렬히 비난하였다. 갑신변복령이 있은 지 10년 뒤인 1894년 9월의 갑오경장 때 의복제도의 개정문제 제기는 12월에 반포하여 관복을 간소화시키고자 하였다. 이에 따라 1895년부터 조신의 대례복은 흑단 령(黑團領)을 입게 하고 진궁시(進宮時)의 통상에복으로 흑색의 주의(主義)와 답호를 입고 사모(紗帽)와 화자(靴子)를 착용하게 하였다.
1895년 3월에는 공사예복을 다시 개정하였다. 공사예복에서 답호 착용을 금하게 하였고 관민이 다같이 흑색의 주의를 입도록 하였다. 이것이 이른바 을미변복령의 요체로 '흑색주 의(黑色周衣)'를 일반인도 입도록 하여 의제상으로라도 관민을 구별하지 않기 위해서이고 편 의를 도모하기 위해서라고 하였다. 요컨대 전통적인 의복제도는 곧 선왕의 법복을 조선의 문화적 긍지의 한 척도로 인식하고 있던 전통적 지식인들은 변복령 반포로 인해 심각한 문 화적 위기의식에 사로 잡히게 되었다.
1895년 11월 15일 단발령이 선포되면서 위정척사 유생들의 의식은 상투는 곧 인륜의 기본 인 효의 상징으로 인식되어 왔었다. 유인석은 변복령이 단행된 이후에 단발령을 예상하였다. 유인석은 단발령에 대하여 변복령과 동일한 인식의 차원에서 화이론적 가치관에 입각해 통 박하였다. 즉 상투(?髮)와 둥근 소매(圓袂)가 화(華)와 인을 상징하고 수구와 자주를 의미한 데 비해 삭발(削髮)과 변복(變服)은 이(夷)와 수(獸)를 상징하고 개화와 예속을 의미한는 것 이라고 인식하였다.


3. 사상적 배경

의병봉기를 가능토록 한 사상적 요인으로는 유생들의 중심이념 체계라고 할 수 있는 위정 척사론(衛正斥邪論)과 일반 농민층까지 널리 퍼져있던 '척왜양창의론(斥倭洋倡義論)'이 있다. 위정척사론은 조선조 지배이념인 주자학 사상과 그 질서를 지키고 반주자학적 체계를 이 단시하여 부정하는 사상적 체계를 말한다. 개항전후기의 주요 배척대상은 서학(西學)·양물(洋物)·왜(倭)가 해당되었다. 병인양요를 전후하여 서양세력의 침략에 이항로를 비롯한 유생들이 상소운동을 통하여 서양세력의 침투를 배척하였다. 그 결과로서는 외양책보다 내수책을 강 조하였다.
한편 위정척사론은 1894년의 갑오변란과 1895년 을미사변·변복령·단발령 공포가 동인이 되 어 변화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 시기 국내외적으로 정세변화는 유생들로 하여금 위정(衛正) 보다는 척사(斥邪)를 우선하도록 강요하였다. 척사의 대상도 왜가 중심이 되었다. 유생들은 개화(開化)를 곧 왜화(倭化)로 인식하는 태도를 확고하게 된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유생들의 전통적인 상소운동을 의병투쟁으로 바꾸는 발전적 변화의 모습을 보여 주었다는 점이다. 이에 따라 척사의 대상이 일본제국주의 세력과 개화파 관리 집단으로 변하면서 위정척사론은 반침략·반개화의 특징을 띠었다. 반침략·반개화 특성을 띠 는 춘천지역 전기 의병투쟁 특성은 화서학파 유생들이 중심이 되어 해산된 동학농민이 일부 참여하였으며, 군인·상인·일반농민 등이 동참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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