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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의 얼 윤희순
글쓴이 : 춘천의병 날짜 : 2012-07-24 (화) 16:30 조회 : 3083
강원의 얼(여성 의병 윤희순).hwp (34.6K), Down : 1, 2012-07-24 16:30:32
윤희순(尹熙順)
(****-****)
1. 성장 과정
춘천의 여성 의병 윤희순 여사는 본관은 해주로 인조 반정 공신인 윤희평(****-****, 공조판서)의 후손 윤익상(****-****)의 큰딸로 1860년 지금의 서울인 한성에서 태어났다.
16세에 위정척사파의 선비 춘천시 남면 휴홍석(외당, 1841- 1913)의 장남 유제원(****-****)과 결혼하였다. 유홍석은 을미의병(1895)당시 유중악, 유중락 등의 춘천 유림과 더불어 이소응을 의병대장으로 추대하고 일본의 앞잡이인 세 관찰사와 일곱 군수를 목베는 등 의병 운동을 한 분이다.
윤희순 여사는 어려서부터 품성이 명민하고 언행이 활달하고 씩씩하였으며 효성이 지극하여 주위의 칭송이 자자하였다.
2. 업적
가. 1895년 명성황후 시해 사건과 단발령으로 각 지역에서 을미의병이 일어났는데 가장 먼저 춘천의병이 일어나자 시아버지인 유홍석이 출정하였다. 이 때 윤희순 여사는 함께 종군하겠다고 간청하였다. 유홍석은 며느리 윤희순에게 전쟁터는 여자가 갈 곳이 아니라면서 조상을 잘 받들고 자손을 올바르게 기를 것을 당부하였다.
윤희순 여사는 살아 돌아올 기약 없이 떠나는 시아버님을 눈물로 전송하고, 그 날 밤부터 뒤뜰에 단을 쌓고 매일 밤 삼경(23시-01시)이 되면 정안수를 떠 놓고 시아버님 유홍석 의병장의 안전한 귀가와 춘천 의병의 승리를 빌었다. 그렇게 정성들여 300일을 기도한 날 시아버님이 돌아오셔서 하는 말이 "내가 살아 돌아 온 것은 며느리가 불공드린 덕인가 하오."라고 하였다.
나. 1895년 춘천지역 을미의병 때 시아버님 유홍석과 남편 유제원이 적극적으로 의병활동을 하자 윤희순 여사는 나라를 구하는 데는 남녀가 다를 수 없으며 꼭 전장에 나가 싸우는 것만이 애국의 길이 아니라 여자라도 해야 할 일이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여성 특유의 강한 애국심과 민족적인 자부심이 담긴 '왜놈 대장 보거라'라는 경고문을 썼다.
"너희 놈들이 우리나라가 욕심나면 그냥 와서 구경이나 하고 갈 것이지, 우리가 너희 놈들에게 무슨 잘못을 하였느냐. 우리나라 사람 이용하여 우리나라 임금님을 괴롭히며 우리나라를 너희놈들이 무슨 일로 통치를 한단 말이야. 우리 조선의 안사람들도 가만히 보고만 있을 줄 아느냐. 우리 안사람도 의병을 할 것이다."
윤희순 여사는 집안에서나 우물가에서 아낙네들을 만나기만 하면 나라가 위급한 데 우리 여자들도 분연히 일어나 의병을 돕고자 외쳤으며 폐쇄된 가정에서만 지내온 여자들을 일깨워 주기 위하여 '안사람 의병가'를 지어서 부르도록 하였다.
"아무리 왜놈들이 강성한들 우리들도 뭉쳐지면 왜놈잡기 쉬울세라. 아무리 여자인들 나라 사랑 모를쏘냐. 아무리 남녀가 유별한들 나라 없이 소용 있나. 우리 의병 도와주세. 우리 나라 성공하면 우리나라 만세로다. 우리 안사람 만만세로다."
그러나 나라를 지켜야 할 관군이 왜군들의 강압에 못이겨 도리어 의병에게 총부리를 겨누고 서로 싸워 우리 백성만 크게 다치는 참극이 벌어지자 크게 한탄하고 '병정가'를 지어 민족의식을 고무시키고자 했습니다.
"애닯도다 애닯도다 형제간의 싸움이요 부자간의 싸움이라. 이런 일 어디 있나 우리 조선 백성들이 이렇듯 어두운가. 귀한 목숨 아무데나 버릴소냐 너도나도 의병하세 의병대를 도와 주세"
관군과 의병의 싸움을 안타까워하고 있던 어느 날 관군에 쫑긴 의병들이 들이닥쳐 심한 행패를 부리자 윤희순 여사는 '불쌍한 백성을 위해 나라에 몸바친 여러분이 이게 무슨 짓이요'하고 꾸짖었다. 의병들이 배고픔을 참지 못해서 그랬노라고 용서를 빌자 음식을 장만하여 배불리 대접하고 옷을 주며 집에 있는 양식도 내주었다. 전투에 패한 의병들이 돌아오면 밥을 지어 먹이고 빨래를 해 주는 등 뒷바라지에도 힘을 기울였다. 그러나 강한 일본군에 비해 의병들이 점점 약해지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한 윤희순 여사는 의병활동에 필요한 군자금 모으기 운동을 시작했고 '방어가'를 지어 청년들을 격려했다.
"우리 조선 청년들아 의병하러 나가 보세 원수 왜놈 몰아 내어 우리나라 지켜보세 조선의 청년들아 의병하러 빨리 나와 의병하세"
그러나 시아버님 유홍석은 그 후 관군에 패하여 만주로 가게 되었는데 이 소식을 들은 윤희순 여사는 분함을 이기지 못하여 '왜놈의 앞잡이들에게 경고한다'는 글을 지어 앞잡이들을 꾸짖었으며 백성들에게 충효정신을 불어 넣어 주고 의병을 격려했다.
"너는 어느 나라 사람인고 너희들은 무슨 일을 그다지도 모르는가 네가 조선 사람인데 일본 사람이 될 수 있느냐? 하루 빨리 마음을 고쳐 먹고 이 나라에 충신되고 애국자가 되도록 해라"
다. 1897년 만주에서 귀국한 시아버님 유홍석이 의병운동을 전개하자 뒷바라지를 하였다. 그러나 나라는 점점 기울어져 끝내는 1905년에 을사조약이 강제로 체결되고 1907년에는 고종황제가 강제로 폐위되어 왜적의 기세는 더욱 올라 나라가 무너질 지경이 되자 전국 각지에서 정미의병을 일으켜 저항하였다.
춘천에서는 1907년 8월에 유홍석이 의병대장이 되어 의병 600여명을 규합해 춘천 가정리에서 훈련을 했으며 춘천 진병산과 의암소 그리고 가평 주길리 등지에서 치열한 혈전을 벌였다. 이 때 윤희순 여사는 남장을 하고 정보 수집을 하였고, 의병장 아내들과 군자금을 모아 춘천 가정리 여의내골에서 놋쇠와 구리 등을 구입해 탄환을 만들고 소변, 쇠똥, 찰흙 등을 모아 화약을 제조해 의병에게 공급하는 탄약제조소 운영에 직접 참여하였다. 또한 가정리 여성 30여명을 모집하여 의병의 취사, 세탁을 맡아 하고 직접 여성 의병으로서 훈련도 함께 하였다. 강원 의병의 특징 중의 하나가 큰 규모의 탄약 제조서가 운영된 점이다. 강원도내 탄약제조소가 운영된 사례는 춘천시 남면 가정리와 양구군 방산면 등매리의 두 곳이 확인되었다.
라. 유홍석은 가평 주길리 전투에서 부상한 후 치료를 받고 다시 의병을 조직하고자 패한 의병과 청년들을 새로 모으는 중 1910년 8월 한일합방이라는 나라의 치욕이 있게 되자, 가족들을 모아 놓고 자결할 결심을 하였다. 그러나 죽는 것 보다는 다시 싸워 나라를 찾아야 한다는 윤희순 여사의 진언으로 시아버님 유홍석과 남편 유제원이 먼저 만주로 망명· 이주하였다. 윤희순 여사도 가사가 정리되는 대로 떠나려 하였는데, 왜경이 갑자기 집으로 들이닥쳐 어린 아들을 매질하면서 시아버지와 남편의 행방을 캐어 물었다. 그 때, 윤희순 여사는 "자식을 죽이고 내가 죽을지언정 큰 일 하시는 시아버님과 남편을 죽게 일려줄 줄 아느냐? 만 번 죽어도 말 못하겠다."고 하였다. 왜경도 그의 위기에 눌리고 감화되어 그대로 돌아갔다. 이것을 보아도 구국을 위한 그녀의 용기가 어떠한지 알 수 있다.
마. 1911년 윤희순 여사는 유돈상, 유민상 두 아들을 데리고 만주로 들어가서 항일운동을 하였다. 그러나 1913년에 시아버님 유홍석, 1925년에는 남편 유제원이 국권회복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윤희순 여사의 구국 의지와 활동은 꺾이지 않았다. 슬픔을 참으며 두 아들에게 용기를 잃지 말고 나라를 위해 활동을 할 것을 당부하였다. 그리고 화전을 일구면서 독립군의 항일운동을 도우며 '의병군가'를 지어 독립운동을 격려하기도 했다.
"나라없이 살 수 없네 나라 찾아 살아 보세 전진하여 왜놈잡자 남김없이 모두 잡자 만세 만세 의병 만세 청년 의병 만만세"
윤희순 여사의 끊임없는 활동은 독립군에게 큰 용기를 주었으며, 왜병을 놀라게 했다. 그리하여 왜병들은 가족을 몰살시키기 위해 윤희순 여사의 집에 불을 질렀다. 그러나 이에 굴하지 않고 윤희순 여사는 대한 독립단에 가입하여 독립운동을 하고 있는 유돈상, 유민상 두 아들을 포함한 자손들에게 희망을 걸고 국권 회복을 위해 열심히 활동을 하였다. 그러다가 1935년 7월 19일 중국 무순에서 대한 독립단 청년들에게 강의하던 장남 유돈상이 일본 경찰에 체포당해 모진 고문으로 순국하자 직접 땅을 파서 아들을 묻고 울분을 억누르면서 윤희순 여사는 정신을 가다듬어 1935년 8월 1일 자손에게 훈계하는 글과 일생록을 남기고 향년 76세로 만주 땅에서 일생을 마쳤다.
"충효 정신을 잊어서는 안 되느니라. 사람이 할 일 이외는 하지 말라. 시국을 따라 오륜을 알아야 하느니라. 발끝에서 머리끝까지 조심이 있어야 하느니라. 흐르는 시대를 따라 옳은 도리가 무엇인가를 생각하며 살아가기 바란다"
윤희순 여사의 시신은 만주 해성현 묘관둔 북산에 묻혔으나 1994년 10월 20일 정부의 후원과 친손자인 유연익의 노력으로 유해가 송환되어 춘천시 남면 관천리 선영에 반장(返葬, 남편 유제원과 합장)되었다. 정부에서는 뒤늦게나마 윤희순 여사의 애국정신을 기리기 위해 1983년 대통령 표창, 1990년에는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3. 관련행사
가. 유적지
(1)묘지와 사적비-춘천시 남면 관천리
(2)해주 윤씨 의적비-춘천시 남면 발산리
(3)윤희순 여사의 동상-춘천시 남면 삼천동 시립도서관 내
(4)기념비-중국 해성시 묘관촌 북산의 옛 묘자리
나. 기념 행사
(1)윤희순 여사 추념 헌다례(차를 올리는 전통적인 의식)-2000년 8월 28일, 윤희순 여사 동상 앞에서, 한국여성예림회강원도지부 주관
(2)윤희순 여사 기념 학술 대회-2000년 8월 29일, 춘천시 강원평생교육정보관 에서, 한국여성예림회강원도지부 주관
(3)윤희순 여사 기념 제 1회 강원도 시낭송 대회-2000년 9월 20일,공영빌딩 대회의실에서, 강원도민일보사 주관
4. 교육적 관련
가. 여성을 대상으로, 여성의 의병 참여를 독려하는 '안사람 의병가'는 여성들도 의병으로 나서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남녀칠세부동석이라는 봉건적 굴레에 묶여 있던 그 시대에 유희순 여사는 그런 구별을 떨쳐버리고 구국 전선에 나서자고 하였다. 따라서 '안사람 의병가'는 나라의 독립과 여성의 독립을 동시에 성취하는 것을 의식화하고 있다.
나. 윤희순 여사의 여러 가지 의병가는 최초의 한글 의병가이고, 왜적을 이땅에서 쫓아내야 한다는 민족저항시가라는 점에서 큰 뜻이 있다.
다. 의병 부대의 취사, 세탁, 군자금 모으기, 탄약 제조 그리고 여러 가지 의병가와 왜놈을 향한 경고문의 발표를 통해 윤희순 여사의 탁월한 지노력을 알 수 있으며, 조선 여성의 당당한 기개를 읽을 수 있다.
라. 윤희순 여사는 유생부인으로서 여성도 배우면 선비가 되고, 선비가 되면 어떤 처지와 조건에도 나라 사랑을 위해 헌신할 수 있다는 것을 국내와 국외의 항일 운동을 통해 몸소 보여 주었다.
5. 자료 출처
가. 책자
(1)박한설. 증보 외당선생삼세록.애국선열윤희순여사기념사업추진위원회.
1995년
(2)이구용, 김흥수, 최창희. 춘천항일독립운동사. 춘천문화원. 1999년
(3)한국여성예림회강원도지부.강원도 여성의 항일 민족 독립 운동.2000년
나. 인터넷 자료
(1)강원도민일보 www.kado.net
(2)강원도청 www.provin.kangwon.kr
(3)가상도시 춘천 aids.hallym.ac.kr/chunchon
(4)Korean Woman. www.koreanwoma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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