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Ⅷ-2.일제의 침략과 의병 전쟁
글쓴이 : 최고관리자 날짜 : 2012-07-24 (화) 16:23 조회 : 1631
8_2일제의침략과의병전쟁.hwp (61.9K), Down : 0, 2012-07-24 16:23:39
Ⅷ-2.일제의 침략과 의병 전쟁
3학년 ( )반 ( )번 이름:[ ]
진주동중학교 3학년 국사 학습지 담 당: 심지혜 검사 [ ]
1 을사조약
⑴ 러일전쟁(1904)
① 배경
러시아의 남하정책 추진: 만주의 철도 부설권
획득, 마산포에 해군 기지 건설 위해
영·일동맹 체결: 영국이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
해 일본을 지원
가쓰라·태프트 밀약
: 미국이 일본의 침략 행위 묵인
② 경과: 러·일전쟁 발발, 러시아에서 혁명 발생
③ 결과: 일본의 승리 - 포츠머스 조약 체결
(러시아는 요동반도의 조차권과 남만주 철도,
사할린 남부를 일본에게 넘겨줌)
④ 영향
국내: 의병항쟁의 확대등 국민의 항일감정고조
국제: 국제 사회에서 일본의 조선 침략 묵인
⑵ 을사조약의 체결(1905)
① 배경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 본격적 침략 추진
② 체결과정: 친일 대신을 앞세워 강압적으로 체결 ③ 주요내용:
외교권 강탈
통감부 설치: 조선의 내정 전반을 간섭
⑶ 을사조약 반대 투쟁
① 고종 황제의 조약 거부
서명 거부: 조약 체결이 무효임을 선언
헐버트를 미국에 보내 지원 요청
헤이그 특사 파견: 제2차 만국평화회의에 이준,
이상설, 이위종을 보내 을사조약의 불법성을 국
제 사회에 널리 알리고자 함
② 민중활동
상인들의 철시
학생들의 자진 휴학
전직고관과 유생들- 조약의 무효 주장
매국노를 규탄하는 상소 올림
③ 언론활동
황성신문: 장지연의 항일 논설
"시일야방성대곡" 게재
대한 매일 신보, 제국 신문
: 을사조약의 불법성을 알림
④ 자결순국: 민영환등
⑤ 의병항쟁
을사조약의 체결로 의병항쟁이 더욱 확대됨
의병활동
의병장
활동지역
출신
민종식
충청도 홍성
양반
최익현
전북 태안, 순창등지
양반
신돌석
평해,울진, 영해등지
양반
평민 출신 의병장의 등장: 신분을 초월하여 전 민족적인 주권 수호운동으로 발전하였음을 보여줌
⑷ 의거활동
① 목적: 침략 원흉이나 매국노를 처단하여 일본의
침략을 저지
② 해외에서의 의거 활동
전명운,장인환: 외교고문 미국인 스티븐슨이
일본의 조선 침략을 찬양하자 사살
안중근:하얼빈에서 초대통감 이토히로부미 사살
③ 국내에서의 의거 활동
이재명:을사조약 체결에 앞장선 이완영 처단
시도
5적 암살단(나철,오기호):을사 5적등 매국노
처단 시도
④ 의의: 우리 민족의 독립의지 널리 알림
2 의병전쟁의 확산
⑴ 고종의 강제 퇴위
① 헤이그 특사 파견 구실로 일본이 ( 고종)을 강제 로 퇴위시킴
② 한 · 일 신협약 체결(1907):차관정치 실시
⑵ 의병 전쟁의 확산
① 군대 해산
일본이 우리나라의 재정이 어렵다는 이유로
군인들의 저항
- 시위대 대대장 박승환의 자결
- 시위대: 일본군과 시가전
- 진위대: 원주, 진주등지에서 항일 전투
② 의병전쟁의 확대
범국민적인 대일전쟁으로 확대: 해산된 군인들 의 의병 합류
조직적인 활동, 근대 무기 구비
서울 진공작전(1908)
- 조직:13도 창의군의 편성(총대장:이인영)
- 과정: 경기도 양주에 집결-서울로 진격
- 결과: 일본군의 우세한 화력과 지원군의 부족
으로 실패
③ 의병세력의 약화: 무기와 전투경험의 부족,
일본군의 대규모 토벌 작전
④ 국군 침탈후 의병부대는 중국, 연해주 등지로 이
동 - 독립군으로 활동
⑤ 의의: 외세의 침략에 대항하는 민족운동의 전개
에 큰 영향 끼침
3 간도와 독도
⑴ 간도문제
① 간도의 역사: 고구려·발해의 영토 말갈족 거주
여진족의 발상지라하여 청이 관리하였으나 우
리 민족이 곳곳에 거주
② 백두산 정계비 건립(조선 숙종)
: 조선의 영토로 표시, 간도 관리사 파견
③ 19세기 말 이후: 일본 침략으로 우리 농민들 간도 이주 증가
민족 교육을 통해 훗날 독립운동의 터전으로 발전
④ 간도 협약(1909): 일본은 안동- 봉천 철도 부설권 을 얻는 대가로 간도를 청에 넘겨줌
⑵ 독도문제
① 독도의 역사
울릉도에 부속된 섬
울릉도민의 본토 이주 ( 조선 초)
안용복이 일본 어민 축출( 조선 숙종)
울릉도에 관청을 설치하여 독도까지 관할
(개항이후)
② 일본의 독도 강탈: 러 · 일 전쟁 중 일본에 강제 편입 시킴
▣ 용어 알기
1) 을사조약
1905년 일본이 강요한 조약. 고종의 서명이 없어 법적 효력이 없는 것이며 합의한 사실이 없기 때문에 조약의 정식 명칭도 없다. 조선의 외교권을 빼앗고 통감 정치를 실시하여 사실상의 식민지로 만들려는 속셈에서 친일 관리의 협조를 얻어 발표하였다.
2) 안중근
일본의 침략에 맞서기 위해 학교를 세워 인재를 길렀다. 을사조약 후 의병 운동을 하다가 만주로 건너가 조선 침략의 우두머리인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하였다. 재판 과정에서 당당히 동양 평화를 주장하였으며, 독서를 즐겨하여 많은 글을 남겼다.
3) 신돌석
경상도 지역에서 활동한 평민 출신 의병장. 태백산 줄기를 따라 활약하여 태백산 호랑이라는 별명을 얻기도 하였다. 양반 유학자가 중심이 된 의병 부대보다 훨씬 과감하게 활동하여 일본에게 위협을 주었다. 1908년 친척의 밀고로 붙들려 처형당하였다.
4) 13도 창의군
군대 해산 이후 전투력을 갖춘 각지의 의병들이 일본군에게 총공격을 하기 만든 연합 의병 부대. 경기도 양주에 모여 서울을 공격하기로 하였으나 일본군의 기습을 받은 데다 평민 의병장은 모두 빠져 있어 실제로 큰 힘을 발휘하기 어려웠다.
을사조약에 대한 저항>을 나타낸 동영상과 아래 글을 보고 물음에 답해 봅시다.
민영환의 유서>
(줄임) 나는 이제 죽어도 혼은 죽지 아니하여 황천에서 여러분을 돕고자 한다. 바라건대 우리 동포들이여 더욱 힘써 노력하고 뜻을 굳게 갖고 학문에 힘써 마음과 마음을 합하고, 힘과 힘을 합하여 우리 자유 독립을 회복할지어다. 그러면 나는 지하에서 기꺼이 웃겠노라. 아! 조금이라도 희망을 잃지 말라. 대한 제국 이천만 동포에게 고한다.
안중근의 거사가>
사나이가 세상에 처함이여!
뜻을 쌓아 마땅히 기특해야 하리로다.
시대가 영웅을 만듦이여! 영웅이 시대를 만들도다.
북풍의 차가움이여! 내 피는 뜨겁도다.
강개하여 한번 떠남이여!
반드시 쥐새끼같은 도적을 무찌르리로다.
동포여 동포여! 대업을 이룰 것을 잊지 말아라.
만세 만세! 대한 독립 만세!
너무 쉬워 3. 을사조약의 체결에 반대하며 자결한 사람은 누구입니까?
너무 쉬워 4. 안중근이 거사하여 하얼빈 역에서 사살한 사람은 누구입니까?
⊙ 人物탐구 ⊙ 다음은 태백산 호랑이 신돌석(****-****)에 관한 글이다. 의병 투쟁의 전개 과정에서 신돌석의 등장이 갖는 의의를 간단히 쓰시오.
경상북도 영해 출신. 1896년 19세의 나이로 의병 100여 명을 모아 처음으로 의거를 일으켰다. 1906년 2차 의병이 시작될 무렵에 다시 부대를 조직하여 활동을 하였는데, 그의 활동 무대가 북으로는 원주, 삼척, 강릉, 양양에 이르고, 남으로는 경주, 영덕, 영해에 이르러 태백산맥 일대의 준령이었기에 그를 '태백산 호랑이'라고도 부른다. 1907년 13도 창의군이 조직될 때, 그의 의병 부대도 1000여 명이 참여하였으나, 양반 유생 중심의 의병 부대 편성으로 인해 제외되자 경상도 영해 부근으로 돌아와 계속 활동하였다. 여러 차례 일본군을 무찔렀고, 전신 시설 설치를 방해하고, 관청을 습격하고 무기를 빼앗으며, 일본군 배를 격침시키기도 하였다. 활동이 어려운 겨울이 다가와 부대를 일시 해산하고 은신해 있다가 부하의 밀고로 잡혀 처형당했다. 신돌석은 한말 의병장 가운데 평민 출신의 의병장으로는 가장 먼저 기병하였으며, 민중적 기반 위에서 막강한 세력을 형성하여 일본군에 큰 타격을 입혔다. 특히 그는 교묘한 게릴라 전술로 장기간 전투를 계속하였는데, 이것은 그의 부대가 규율이 엄하고 민폐를 끼치지 않았기 때문에 민중들의 환영과 보호를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 남한대토벌 ◑
일제의 잔혹한 진압으로 1909년에 접어들면서 의병부대들이 전반적으로 분산화, 소규모화의 경향을 띠면서 소강상태로 접어들었지만, 유독 호남지방, 특히 전라남도에서는 의병투쟁이 강고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이는 호남지역이 전국적으로 일제의 경제적 침략이 가장 극심한 지역이기 때문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호남지역의 의병투쟁은 장기화되자, 일제로서는 호남 의병을 제거하지 않으면 한국을 병합할 수 없다는 판단에 이른 것이다.1909년 9월 1일 자로 시작된 이른바 '남한대토벌작전'으로 지역 내 모든 가옥과 주민들이 무자비하게 학살되었고, 9,10월 불과 두 달 동안 103명의 의병장과 4138명의 의병이 살육 또는 체포되었다.
◐ 도우미 ◑ '을사 5적'과 일진회
을사 5적: 외부대신 박제순; 내부대신 이지용; 군부대신 이근택; 학부대신 이완용; 농상공부대신 권중현
일진회: 1904년 8월에 창립, 동학교도들을 이끌던 이용구, 대표적인 친일파라 할 수 있는 송병준 등이 중심. 창립 이후 회원들이 일제히 단발을 하고 양복을 착용. 러일 전쟁에서 일본을 돕는 활동 전개, 전쟁이 일본의 승리로 끝난 이후 일본에 외교권의 이양을 주장함. 1909년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하자, "한국 정부를 폐지하고 일본이 직접 통치할 것"을 요구하는 활동을 함.
*【언론 활동】: 장지연 「시일야 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
探究과제 2. 황성신문의 주필이었던 장지연의 「시일야 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을 읽고 주요 논지를 정리해 보자.
지난번에 이토가 한국에 옴에 우리 인민들이 서로 말하기를 이토는 동양 삼국의 평화를 널리 주선하던 인물이라. 금일 내한함이 필시 우리의 독립을 공고히 할 방안을 권고하리라 하여 서울과 지방의 여러 인민들이 환영하였더니, 세상일이란 참으로 예측할 수 없도다. 천만 뜻밖에도 5조약을 어떤 까닭으로 제출하였는가. 이 조약은 비단 우리 나라 뿐 아니라 동양 삼국이 분열하는 조짐을 보인 것이니 이토의 본래의 뜻은 과연 무엇이었는가?
그러나 우리 대황제 폐하께서 강경하신 뜻으로 이를 거절하고 말았으니 이 조약이 성립할 수 없음은 이토 스스로도 알 수 있는 일이거늘, 슬프다! 개, 돼지 새끼만도 못한 외부대신 박제순과 각 대신은 족히 책망할 가치도 없으려니와 이름을 소위 참정 대신이라 하는 자는 정부의 우두머리로 겨우 '아니오'라는 말만 하여 이름만 남기고자 하였을 따름인가!…편안히 살아 이 세상에 남아 무슨 면목으로 강경하신 황제 폐하를 볼 것이며, 무슨 면목으로 2천만 동포를 대할 것인가? 슬프다 찢어질 듯한 마음이여. 우리 2천만 동포들이여! 살았느냐 죽었느냐! 단군 기자이래 4천년 국민 정신이 하룻밤 사이에 졸연히 망하고 말지 않았는가? 아프고 아프도다. 동포여, 동포여!
皇城新聞 1905. 11. 20>
을사조약의 불법성(고종의 거부, 이토의 강요) 강조 친일파(을사오적) 비난 민족적 항쟁 호소( 장지연 경무청 연행, 황성신문 무기정간)
* 기타: 상가는 철시, 학생은 동맹휴학, 일본군과 유혈 충돌, 평양청년 5명 격문 살포…
역사 속으로...
자, 우리 총칼을 들자
일제가 러·일 전쟁을 도발하고 우리 국토를 강점하려들면서 이에 대한 저항은 시작되었다. 이러한 저항 운동은, 일제가 을사조약을 강요하여 우리의 주권을 빼앗으려 든 1905년 이후 더욱 확산되었다. 먼저 대규모 의병을 일으킨 쪽은 민종식, 최익현과 같은 전직 관리나 양반 유학자들이었다. 이들은 을사조약을 강요한 일제가 그 옛날 임진왜란을 일으켰던 그 침략자들이며, 10년 전 을미사변을 일으켜 왕비를 살해한 그 일본이란 점을 강조했다. 그리고 이들과의 싸움에 온 국민이 나설 것을 호소했다.
이들이 의병을 일으키자, 수많은 민중들이 이들의 부대를 찾아 일제와 싸웠다. 그리고 또 다른 민중들은 독자적인 의병 부대를 조직하여 일제에 맞섰는데, 태백산을 중심으로 활동한 신돌석은 대표적인 평민 의병장이었다.
의병들의 투쟁은, 일제가 우리 군대를 강제로 해산시킨 이후 더욱 확산되었다. 그리하여 1908-9년 사이에는 평민들의 의병 참여 확대, 해산 군인과 포수들의 의병 참여 등으로 의병 활동이 최고조에 달했다. 이들의 투쟁이 일제를 몰아내는데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죽음을 무릅쓴 투쟁은 오래 동안 희망과 용기를 주었으며, 일제의 강점을 지연시켰으며, 다양한 민족 운동이 일어날 수 있도록 지원하였다.
◈ 첫눈에 알아봤죠~
다음 글을 잘 읽고 물음에 답해 봅시다.
(가) 아! 왜놈들의 소위 신의나 법리는 말할 것조차 없거니와 저 국적놈들의 몸뚱이는 뉘를 힘입어 살아왔던가. 원통함을 어찌하리. 국모의 원수를 생각하며 이를 갈았는데, 참혹함이 더욱 심해져 임금께서 또 머리를 깎으시는 지경에 이르렀다. 의관을 찢긴 데다가 또 이런 망극한 화를 만났으니, 천지가 뒤집어져 우리 고유의 이성을 보전할 길이 없다. 우리 부모에게 받은 몸을 금수로 만드니 무슨 일이며, 우리 부모에게 받은 머리카락을 풀 베듯이 베어버리니 이 무슨 변고란 말인가. (줄임) 무릇 우리 각도 충의의 인사들을 모두가 임금의 보살핌을 받은 몸이니 환난을 회피하기란 죽음보다 더 괴로우며 멸망을 앉아서 기다릴진대 싸워보는 것만 같지 못하다. 독립운동사 자료집>
(나) 신돌석은 경상도 영덕 사람이데 사납고 날쌔어 날아다는 것 같았다. 필마단창으로 적을 무수히 죽이니, 일병들이 온갖 계책을 써서 생포하려 하였으나 잡지 못하였다. 이리하여 많은 현상금을 붙였더니 그 부하의 속임수에 빠져 죽었다. 한국 독립 운동 지혈사>
신분
의병장
의병
양반
평민
2,141
2,162
2,198
2,227
(다) 1909년 7월 30일 13도 의병 군사장(허위)은 미리 군비를 신속히 정돈하여 철통과 같이 함에 한 방울의 물도 샐 틈이 없는지라. 이에 전군에 명령을 내려 일제히 진군을 재촉하여 동대문 밖으로 진군하였다. (줄임) 이때에 사기를 고무하여 서울 진공의 영을 발하니, 그 목적은 서울로 들어가 통감부를 쳐부수고 저들의 소위 신협약 등을 파기하여 대대적 활동을 기도함이라. 대한 매일 신보>
(라) 13도 의병 총대장인 이인영은 서울 진공 작전을 앞두고 부친 사망의 부음을 받자 뒷일을 군사장 허위에게 부탁하고 통문으로 의병 운동을 중지하라고 각 진에 통달한 후 그 날로 문경으로 돌아갔다. 장례가 끝난 뒤 각지 의병들이 다시 그에게 일어설 것을 요청하자, 그는 3년 상의 효도를 다한 후에 재기하여 일
인을 소탕하겠노라고 말하면서 의병들의 권고를 사절하였다. 그는 상주, 황간에 거주하다가 일본 헌병에게 체포되어 경성 감옥에서 처형되었다.
너무 쉬워 2. 유인석과 같이 양반으로서 의병장이 되어 의병 전쟁을 이끈 사람은 누
구입니까?
너무 쉬워 3. 평민 의병장으로 활약했던 사람은 누구입니까?
너무 쉬워 4. 전국 13도의 의병들이 모두 모여 일본군을 총공격하기 위해 준비한 것
을 □□ □□ 작전이라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