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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말 호남 지역의 의병 항쟁 권내현(고려대 강사)
글쓴이 : 최고관리자 날짜 : 2012-07-24 (화) 16:25 조회 : 1516
한말 호남 지역의 의병 항쟁
근대 반침략 민족운동 과정서 중심 역할
1896년 장성 유생 기우만등 의해 항쟁 시작

권내현(고려대 강사)
개항 이후 우리의 근대사는 제국주의 외세의 침략을 배격하는 반제 반침략 투쟁으로 점철되었다. 외세에 대한 저항은 동학 농민 전쟁을 거쳐, 의병 전쟁으로 다시 식민지 시기의 독립 전쟁으로 면면이 이어지면서 근대 민족 운동사의 큰 줄기를 형성하였다. 이 가운데 의병 전쟁은 일제의 침략이 거세 지던 1894년을 기점으로 20여 년 간 한반도 전역에 걸친 최대의 항일 무장 투쟁으로 자리잡고 있었다. 의병 전쟁은 대체로 3단계의 발전 과정을 거치면서 치열하게 전개되었고, 호남 지역은 동학 농민 전쟁의 후유증을 극복하면서 점차 항쟁의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해 나갔다. 1단계인 을미 의병은 일본의 명성황후 살해와 뒤이은 친일 내각의 단발령 조처로 촉발되었다. 전통적 유교 관념에 충실하였던 양반 유생들의 반감은 기울어져 가는 나라의 현실에 대한 위기 의식과 맞물리면서 무장 투쟁으로 이어졌다. 여기에는 동학 농민 전쟁 실패 이후 일본의 침략과 무능한 정부 아래에서 신음하던 농민들이 적극 가담하였다.
호남은 격렬한 농민 전쟁을 치렀던 탓에 다른 지역보다 다소 늦은 1896년 초 장성 유생 기우만(奇宇萬) 등에 의해 의병 항쟁이 시작되었다. 이를 계기로 나주, 해남, 광주, 담양 등지에서 차례로 의병이 일어났고, 이들은 다시 광주에 집결하여 호남 창의군을 편성해 친일 관리를 제거하는 등의 활약을 펼쳤다. 당시 기우만은 우도 의병 대장, 창평 유생 고광순(高光洵)은 좌도 의병 대장이 되어 활동하였는데, 군사력이나 무기는 보잘것없어서 관군에 효과적으로 대항할 수 있는 수준은 아니었다. 더구나 이들은 유생으로 대부분 지역의 의병장들과 마찬가지로 고종의 해산 조칙을 거부하지 못하는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초기 의병은 강렬한 항일 정신과는 별개로 큰 성과 없이 흩어지고 말았다.
1905년에는 을사조약의 체결로 일본의 주권 침탈이 노골화되자 2단계인 을사 의병이 전국적으로 일어났다. 을사 의병은 전단계 보다 조직적이고 광범위한 대중적 기반을 가졌으며 국권 회복을 목적으로 하는 반제 반침략의 성격을 뚜렷이 하였다. 호남 지역의 의병 활동도 을미 의병에 비해 훨씬 적극적인 모습을 띠었다. 태인의 최익현(崔益鉉)과 임병찬(林炳贊), 남원의 양한규(梁漢奎), 담양의 고광순(高光洵) 등이 당시 호남의 대표적인 의병장이었다.
당대의 거유였던 최익현은 군사적인 활동이 두드러졌던 것은 아니지만 그의 의병 봉기 자체가 인근의 유림과 농민들을 항쟁 대열로 이끌게 하였다. 하지만 그와 임병찬의 태인 의병은 관군의 탄압으로 해산되고 말았으며, 일본군에 의해 대마도로 끌려간 최익현이 음식을 거부하고 아사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양한규는 병력 1천여 명을 이끌고 지리산 일대에서 활약하다 남원 전투에서 전사하였다. 일찍이 을미 의병 시기에도 봉기하였던 고광순은 순천, 화순, 곡성 등지를 돌며 항전하다 지리산 연곡사에서 전사하였다. 이 밖에 영광에서는 이대극(李大克) 부대가, 광양에서는 백낙구(白樂九) 부대가 활동하고 있었다.
이 때의 의병은 일본군과 관군에 효과적으로 대항하기 위해 부대를 소규모로 편성하고 산악을 근거지로 유격 전술을 펼쳐 전투 양상은 훨씬 치열하였다. 뿐만 아니라 일본의 침탈에 시달리고 있던 농민들의 참여 폭이 확대되면서 대중적 기반이 강화되었다. 1907년에는 다시 대한제국 군대가 강제로 해산되자 군인들과 화적, 사냥꾼, 광부 등 평민들이 대거 의병으로 참여하면서 대중적 성격이 더욱 뚜렷해졌다. 때문에 각지에서 평민 의병장들도 출현할 수 있었다.
이렇게 시작된 3단계의 정미 의병은 단위 부대들이 연합 전선을 형성하여 서울 진공 작전을 감행하는 등 항일 전쟁의 주체로 발전하였다. 근대식 무기를 가진, 훈련된 해산 군인의 참여는 전쟁을 수행하는 막강한 무장력이 되어 주었다. 호남에서는 먼저 을미 의병 당시 투옥되었던 기삼연(奇參衍)이 장성에서 창의 대장에 임명되어 항쟁을 시작하였다. 그의 부대는 고창을 거쳐 법성포를 공격하여 양곡 운반로를 점령하였고, 광주, 나주, 순창 등지에서 일본인과 친일파를 처단하였다. 그러나 기삼연은 일본군의 역습으로 부대를 해산하고 재기를 도모하던 중 체포, 피살되었다. 이후 함평의 심남일(沈南一)이 의병을 조직하고 해산 군인을 수습하여 큰 전과를 올렸다. 그의 부대는 강진에서 적 수십 명을 죽이고 다수의 병기를 노획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심남일 역시 일본군의 대대적인 공세를 피해 휘하의 의병을 일시 해산하고 피신해 있던 중 체포되어 감옥에서 순국하였다. 이들 외에도 보성의 평민 출신 안규홍(安圭洪), 전주의 이규홍(李圭弘), 임실의 이석용(李錫庸), 순창의 양윤숙(楊允淑) 등이 이름을 날렸다.
3단계 의병 항쟁의 정점이었던 13도 의병 연합군의 서울 진공 작전에는 문태수(文泰洙)가 호남 의병대장의 자격으로 참여하였다. 연합군은 각국 영사관에 국제 공법상의 전쟁 단체로 인정해 줄 것을 요구하여 의병 항쟁의 독립 전쟁적 성격을 명확히 하였다. 하지만 선발 부대의 패배와 총대장 이인영(李麟榮)의 낙향 등으로 전열이 흐트러지면서 작전은 실패로 돌아갔다. 진공 작전 이후 전국의 의병 부대들은 다시 각기 독자적인 활동에 들어갔다. 이 때를 전후한 1908년과 1909년의 2년간은 의병 항쟁이 가장 격렬하게 전개되었던 시기이다. 특히 호남 지역의 위세가 가장 두드러지면서 전국 의병 항쟁의 중심지로 부상하였다. 1909년을 예로 들면 교전 회수의 47.3%, 교전 의병수의 60.1%가 호남에 집중되어 있었다.
따라서 한국 병합을 위해 의병과의 전쟁을 빨리 종결시킬 필요가 있었던 일본은 남한 의병의 가장 강력한 근거지였던 호남에 대한 대토벌 작전에 들어갔다. 이른바 '남한 대토벌 작전'에 따라 많은 의병들이 희생되면서 의병 항쟁은 침체에 빠졌고, 마침내 1910년 일본은 '합방'을 단행하였다. 이후 국내에서 활동이 어렵게 된 의병들은 만주나 연해주로 이동해 독립 전쟁 단체를 조직해 나갔다. 이제 의병은 독립군으로 전환되어 1920년대 무장 항일 투쟁의 주류를 형성하게 되었다. 결국 호남은 동학 농민 전쟁에서 의병 전쟁으로 이어지는 근대 반침략 민족 운동의 과정에서 중심지적인 역할을 다하고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