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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때의 호서지방 의병 활동
글쓴이 : 최고관리자 날짜 : 2012-07-24 (화) 16:26 조회 : 15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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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절 임진왜란 때의 호서지방 의병 활동
1. 임진왜란과 민족의 저항(抵抗)
원래 왜구가 출현한 것은 고려 중기부터로 우리나라 사람의 재물을 약탈하고 인명을 살상하였다. 조선초에 이르러서도 이런 왜구의 동향은 끊어지질 않아서 중앙정부는 서남해에 출몰하는 왜군을 격퇴하기 위해 강력한 수군을 조직하여 이들의 방어에 힘쓰고 한편으로 왜구와 사무역은 금지하고 공무역만을 허락하여 이들과 물물교류의 창구를 국가가 장악하여 이들을 통제·유화하고 있었다.
충청도 서해안 지방은 리아스식 지형으로 해안이 발달해 있는 데다 조수간만의 차이가 커서 왜구가 한번 들어오면 이들을 방어하기에 곤란하였다. 더구나 하삼도의 조운(漕運) 선박이 이곳을 통과하게 되어있어 이 지방에는 왜구의 출몰이 잦았었다.
그리하여 조선 세종때에는 대 왜구 강경책을 추구하여 이종무로 하여금 삼도관찰사를 삼아 경상·전라·충청 3도의 병선 200여척에 병사를 태우고 왜구의 본거지인 대마도를 공격하여 왜구을 소탕하였다. 이런 대왜구 강경정책의 실시로 이후 왜구는 출몰이 일시 위축이 되었다. 그러나 이후에도 왜구는 우리나라 연해에 출몰하여 우리 백성을 괴롭히고 있었다.
선조 25년(1592) 4월에 일본의 도요또미히데요시(豊臣秀吉)는 15만 대군으로 조선을 침략하여 임진왜란(壬辰倭亂)과 정유재란(丁酉再亂) 등 2차에 걸쳐 7년 전쟁을 벌였다.
가. 호서지방의 의병 봉기 (蜂起)
1) 금산(錦山) 천내리 의병전투
금산 천내리 의병전투는 금산군 제원면 천내리의 천내리산성에서 벌어진 금산군수 권종(權琮)과 제원역 찰방 이극연이 왜군과 벌인 전투를 말한다. 임진왜란이 일어난 해 6월 옥천을 점령한 왜군은 금산을 통해서 전라도로 침입하려고 금산쪽으로 진격하여 왔다. 이때 왜군의 주력군이 영동에서 출발하여 금산에 가기 위해 양산을 지나 전진하여 오므로, 금산군수 권종은 군사를 정비하고 금산읍에서 동쪽으로 15리 떨어진 이곳 천내리 산성에서 진을 치고 왜군을 기다리고 있었다.
권종이 이곳에 진을 친 것은 자연지형 조건을 이용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강물쪽으로 절벽에 성을 쌍아 더욱 방어를 두텁게 하였고 성안에는 지휘소 겸 최후의 방어벽을 두어 대비하였다. 6월 22일 고바야가와(小早川隆景)가 이끄는 왜군 제6군 15,000명의 병력이 천내천에 도착하여 강을 건너자 권종은 이들을 공격하여 승리하였다. 그러나 다음날 왜군이 산성을 삼면으로 포위하고 재공격하여 성이 함락되고 권종은 아들 권인후(權仁厚)와 성에서 순절하고 말았다.
2) 이치대첩(梨峙大捷)
경기도 용인에서 왜적에게 패한 광주목사 권율은 광주 부근에서 이곳 주변의 자제 100여인을 모아 훈련을 시키고 있었다. 그러던 중 왜적이 금산(錦山)에 집결하여 전라도 지역을 공격하고자 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이를 저지하기 위해 군사를 이끌고 대둔산 기슭의 배고개(梨峙)에 진을 치고 있다가 쳐들어오는 왜군을 무찌른 전투가 이치대첩이다.
선조 25년(1592) 7월 5일 배고개를 바라보고 진격중이던 권율장군은 김제군수 정심감이 먼저 왜군의 호남진출을 막겠다고 나서자 그로 하여금 먼저 응전케 하였다. 그러나 정심감은 7월 6일 곰티(熊峙) 싸움에서 왜군 안국사혜(安國寺惠)의 군대와 싸워 패하여 전사하고 말았다. 그러자 권율은 다음날인 7월 7일에 이치에 도착하여 막료인 황진(黃進), 공시억(孔時億)과 함께 진을 치고 그날 밤 전승을 비는 산신제까지 올리며 기다리고 있었다.
권율은 진산에서 운주로 넘어가는 대둔산의 지(之)자 형의 계곡에 군사를 매복하고 기다렸다. 해가 뜨고 10시경이 되자 왜군은 고갯길로 들어섰다. 그들의 대군이 태봉골 골짜기로 들어섰을 때 권율이 봉화를 올리자 여러 봉우리에서 깃발이 날리고 봉화가 오르고 군사들의 함성이 터져나왔다. 왜군들이 산봉우리로 오르기 시작하면서 격전이 벌어져 전투가 가열되고 있을 때, 쌍령치(雙嶺峙)의 의적 안수(安壽)의 무리가 지어 왜구를 공격하였다. 권율의 관군과 안수의 무리가 합심하여 왜군을 공격한 것이었다.
전투의 결과는 우리측의 승리였다. 권율의 방어로 이치는 우리의 진지로 남아 있게 되었고 전라도는 왜군의 손에서 보호될 수 있었다.
3) 금산(錦山) 눈벌 전투
금산 눈벌전투는 전라도 장흥에서 의거한 고경명이 7월 9일에 금산 금성면에서 왜군과 벌인 싸움을 말한다. 이해 5월에 장흥에서 고경명과 유팽노 등이 의거하여 담양에서 의병 7,000명을 결속하여 북상하였다. 고경명과 그 아들 고종후는 호서지방과 경기·해서지방에 격문을 뿌리며 행궁이 있는 평안도로 가고자 전라도 여산과 은진을 거쳐 노성으로 향하고 있을때 왜군이 금산에 침입했다는 소식을 듣고 금산으로 향하였다. 진산을 거쳐 금성면 눈벌에 도착한 것은 7월 8일이었다. 금산성에는 이미 왜군이 있었으므로 눈벌에서 전열을 정비하면서 고경명의 의병은 이튿날 적을 무찌를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그러나 왜군에게 이 사실이 미리 알려져 선제공격을 당하여 고경명은 혈전을 벌이다 이곳에서 순절하였다.
4) 청주성(淸州城) 탈환 전투
청주성 전투는 왜장 구로다(黑田長政)가 거느린 부대에 의해 점령된 청주성을 탈환한 싸움이다. 청주성이 왜장에게 점령될 때 방어사 이옥과 조방어장 윤경기도 패주하였고, 의사 박우현도 전사하여 청주지방 의병의 사기가 떨어져 있었다. 이 때 승장군(僧將軍) 영규대사가 승병 500여명을 거느리고 청주를 공격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조헌이 휘하의 의병을 데리고 영규대사와 합세하여 청주성을 공격하여 8월 1일에 청주성을 탈환하였다.
5) 금산(錦山) 와룡평(臥龍坪) 전투
금산 와룡평 전투는 조헌이 이끄는 의병 700여명이 왜군을 맞아 싸우다 순절한 전투를 말한다. 조헌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충청북도 옥천에서 창의하였는데, 대전에 사는 박사진과, 청양 정산의 임정식, 전의의 이려, 공주의 노응완 형제 등이 동조하여 가세하면서 규모가 커졌고, 특히 영규대사가 이끄는 승군(僧軍)과 합세하면서 1,700여명으로 성장하였다. 그리하여 4월 하순에 보은군 수한면의 동령(東嶺)을 넘어서 청주로 진격하였다. 이러는 사이 홍성에서 기병한 신난수와 장덕개 등의 의병 1,600여명이 양동작전으로 왜군이 점령하고 있던 청주성으로 진격하여 8월에 청주성을 탈환하였다.
그러던 중 조헌은 왜군이 전라도를 공격하려 한다는 소식을 듣고 관찰사 윤선각과 함께 금산의 왜적을 무찌르기로 하고 금산으로 이동하였다. 조헌 등의 의병이 금산에 도착했을 때는 의병의 수가 감소하여 700여명이 되어 있었고, 관찰사 윤선각의 관군도 오지 않았다. 이런 어려운 상태에서 왜군과 싸운다는 것은 무리가 있었다. 그러나 조헌 등의 의병은 이런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이튿날 8월 18일 새벽에 와룡평에서 왜군과 격렬한 전투를 벌여 의로운 순절을 하였다.
6) 아산·충주·황간 전투
아산에서는 우의정을 역임한 심수경(沈守慶)이 의병을 일으켰다. 그는 스스로를 팔도의병장이라 칭하고 의병을 이끌고 아산지방을 방어했으며, 또한 아산 현감 임기(任琦)도 의병을 일으켜 창의의 기치를 높였다. 아산 출신인 윤지복(尹之復)은 의병 200여명을 이끌고 호서병마사의 진영에서 활동하였다.
충주지방에서는 충주의 세거사족인 조웅(趙熊)이 충주에서 500명의 의병을 모아 왜적을 무찌르다 전사했고, 또 추풍령에서는 황간사람인 장지현(張智賢)이 영동·황간지방에서 의병을 일으켜 추풍령에서 구로다(黑田長政)와 모리부대(毛利部隊)의 북상을 저지하다 순절하였다.
나. 정유재란
임진왜란이 일어난 후 명나라 군사가 개입하면서 왜군의 철군을 위한 강화회담이 진행되었다. 그러던 중 심유경(沈惟慶)의 농간으로 5년이나 끌던 협상은 결렬되고 선조 30년(1597) 왜군과의 전쟁이 다시 전개되었다. 이를 정유재란이라 한다.
왜군은 141,500명의 병력으로 재공격하여 경상·전라·충청 하삼도를 완전 장악할 목적으로 북상하였다. 그러나 왜군은 영호남의 요충지인 황석산성(黃石山城)에서 현감 곽준과 함양군수 조종도(趙宗道)가 지휘하는 우리 군사에 의해서 타격을 받았다. 또 구로다(黑田長政)의 부대는 직산에서 명나라 장군 해생(解生)의 부대에게 대패하여 북상을 정지하고 남하하여 해안에서 웅거하였다. 이러는 사이 해군(海軍)에서 이순신은 왜군을 명량해전에서 대파하였다. 이러는 사이 일본의 집권자 토요토미히데요시(豊臣秀吉)가 죽자 왜군은 퇴각하기 시작하였고, 이런 중에 이순신 장군은 사천·남해 등지에서 활동하다 퇴각하는 왜선 300여척을 노량에서 대파하고 순절하였다. 이 노량해전은 임진왜란·정유재란의 마지막 싸움이었고 우리의 승리로 귀결되었다.
2. 임진왜란 전후의 민간반란(民間叛亂)
가. 의적 안수(安壽)와 송유진(宋儒眞)의 난
안수는 공주군 정안면 원덕리 원터 남쪽에 차령고개를 중심으로 도적활동을 한 사람이다. 그는 명종 때 일곱살의 나이에 종으로 팔려가 사족의 가노가 되었다. 그가 17살이 되었을 때 보릿고개와 가뭄으로 자연재해가 겹쳤다. 이때 그의 주인집으로 쌀 한 됫박을 구걸하러 온 촌로(村老)가 주인에게 타살되는 것을 목격하였다. 이 사건은 가뭄으로 많은 사람이 굶어 죽어가는 가운데에도 그의 주인은 광에서 곡식을 쌓아두고 자기의 욕심만 차리고 있으면서 쌀을 구걸하러 온 촌로가 사정 끝에 통곡을 하니 소리를 지른다고 그 집 종들을 시켜 촌로를 구타하여 죽게 만든 사건이었다.
그런 장면을 목격한 안수는 그의 주인집 광에서 쌀을 훔쳐서 촌로의 집에 달려갔다. 그러나 촌로의 집에도 맞아 죽은 노인의 아내가 굶어 신음하며 죽어 가고 있었던 비극적인 장면을 다시 목격하였다. 그리하여 안수는 주인집의 광으로 달려가 곡식을 털어 굶주린 백성에게 나누어주고 그 길로 쌍고개로 올라가 의적이 되었다.
고개를 쌍고개라 한 것은 이 고개가 공주 이남 지역의 조세와 진상물이 한양으로 올라갈 때 통하는 길이었고, 아산군 공세창과 백석포로 닿는 교통요충지였기 때문에 많은 사람이 왕래하여 고개길이 두개가 되었던 데서 유래하였다. 안수는 바로 이곳에서 진을 치고 의적활동을 전개한 것이다. 안수가 이곳에서 의적활동을 하자 주변에서 도당(徒黨)이 몰려들어 안수는 쌍고개의 서남쪽에 있는 성내에 본거지를 짓기도 했다. 성안은 사방이 절벽으로 되어있고, 그 안에는 작은 들이 있었다. 그는 이곳에 성을 쌓고 다음에 모여드는 지지세력을 위해 지침사항을 하달했다. 지침사항은 살상을 하지 말 것, 가난한 사람의 집에서는 바늘하나 가져오지 말 것 등을 제시했다. 그의 세력은 점차 확대되어 마침내 충청도 공주, 청주까지 영향을 미치게 되었고, 무리가 3,000명에 이르게 되었다.
이런 그의 활동은 국가적으로 반란이었기 때문에 그가 의적활동을 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당연히 단죄되어야 했다. 그리하여 조정에서도 그와 그의 무리를 토벌하게 되어 마침내 임진왜란 중에 유의신(柳義臣) 의병장이 이끄는 관군에게 섬멸되었고, 안수도 잡혀 처형되었다. 안수는 처형되었으나 그를 따르던 도적무리는 임진왜란 권율의 이치전투를 전개할 때 복수면 태봉골에 달려가 왜군을 치다가 모두 전사하였다. 안수의 이런 활동은 뒤에 충청도 홍길동전이라고 구전으로 전해 오고 있다.
송유진(宋儒眞)은 천안시 직산을 근거지로 도적활동을 자행했는데 원래 그는 한성의 사족 출신이었다. 그는 임진왜란이 지속되면서 나라의 방비가 허술해진 틈을 타서 충청도 지방의 도적과 불평있는 천민을 규합하여 자칭 의병대장이라 칭하고 무리 2,000여명을 포섭하여 세력을 이루었다. 그는 속리산, 청계산, 광덕산 등에서 난행을 자행했다. 송유진은 선조 27년(1594) 정월 3일 대낮에 보병(步兵)과 기병(騎兵) 40명으로 우마와 곡물을 약탈하였다. 뒤에 천안과 아산을 활보하면서 그해 정월 10일에는 동병을 꾀하여 아산·평택의 병기(兵器)를 약탈하여 한양으로 침입하고자 하였다. 이들의 횡포와 만행을 일소하기 위해서 충청감사에게 이들의 체포를 명령했지만 전란으로 무력해진 관군으로는 속수무책이었다. 이 때 진천 출신의 무인(武人) 김응룡(金應龍)이 계책을 세워 그와 그의 일당을 체포하였다. 그리하여 송유진·오원종·김대수 등은 처형되고 그들의 가산은 몰수되었다. 이들은 국문하는 중에 의병장 이산겸(李山謙)도 연좌되었다고 허위로 공조하여 이산겸이 억울하게 치죄되기도 했다.
나. 이몽학 (李夢鶴)의 난
임진왜란의 혼란이 지나가고 거듭하여 한해가 극심하여 민심이 흉흉할 때 부여 홍산에서 대규모의 반란이 일어났다. 이를 이몽학의 난이라 한다. 난을 일으킨 이몽학은 충청도 홍산 구룡(九龍) 사람으로 전주 이씨 가문의 서자로 태어났다. 일찍부터 글공부를 하였으나 호탕한 일을 하면서 호서지방을 방랑하다가 마침내 조정관원으로 모속관(慕粟官)이 된 한순의 아래에서 모속장으로 있었다.
가뭄에 시달리던 백성과 조정이 힘이 약화되어 후방의 방비가 허약하자 홍산 무량사에서 역모의 계획을 세우고 백성을 규합하였다. 그는 왜적을 방비한다는 명분으로 부여 은산의 이중산성(二重山城)과 청양 적곡·청남에서 기반을 마련하였다. 그리고 역도들에게 군사훈련을 시키는 한편 군량을 비축하였다가 선조 29년(1596) 7월 6일에 이몽학은 김경창·이 귀·장준재 등 1,000여명을 거느리고 선봉장이 되어 무량사를 출발하여 홍산현으로 쳐들어가 현감 윤영현(尹英賢)을 생포하고 군기를 착취한 다음 임천군을 함락시키고 군수 박진국(朴振國)을 붙잡았다.
이튿날 7일에는 정산현으로 침공하여 함락시켰다. 이몽학의 난이 홍주목사 홍가신(洪可臣)에게 보고된 것은 이날이었다. 7월 8일에는 청양이 함락되고, 청양현감 윤승서(尹承緖)는 도망갔다. 9일에는 대흥이 함락되고, 10일에는 홍주를 향해서 공격했다. 홍주목사 홍가신은 성문을 굳게 닫고 성을 지키고 있었다. 이몽학은 홍주성 공격을 전후하여 호서지방 여러 곳에 격문을 보내고 반란에 가담하도록 선동하였다. 그러자 많은 불평불만자가 호응하여 각 군현의 수령들은 난민에게 투항하거나 도피하는 사태가 속출했다.
홍주성은 목사 홍가신의 지휘 하에 고군혈전을 벌이고 있었다. 이에 충청병마사 이시언(李時言)은 홍주로 달려가 지원하고 순찰사 이시발(李時發)은 유구에서 포진하였으며, 홍주에서는 결성 출신의 의병장 임득의(林得義)와 박명현(朴名賢)이 활동하니 이몽학의 반란군은 홍주성의 함락이 어렵게 되자 7월 11일 새벽에 덕산으로 퇴각하였다. 이 때 박명현은 홍주성 중의 군사를 이끌고 진격하여 청양까지 갔으며, 충청수사 최호(崔湖)는 역도들의 진영까지 추격하였다. 전주판관의 아병인 윤성(尹誠)은 장사 10여명을 이끌고 야음을 틈타 역도의 진지에 들어가 총을 난사하며 고함을 지르니 적도들이 무너지고 흩어졌다.
이런 중 역도의 무리인 김경창(金慶昌)은 이몽학(李夢鶴)의 막중(幕中)에 들어가 그의 목을 베어 가지고 관군에게 투항하였다. 그러나 적장 한현(韓玄)이 이끄는 수천 명의 역도는 끝까지 저항하였으나 충청병마사 이시언(李時言)이 거느린 군사와 홍가신 군사의 반격을 받아 무너지고 한현은 생포되어 참수되었다. 그리고 그들의 두령격인 한순은 면천 향리에서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그리하여 이몽학의 반란은 진압되고 이몽학의 출신 고을인 홍산은 혁파되고 살던 집은 허물고 연못을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