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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전기 춘천의병의 개황

전기 춘천의병은 강원도 관찰부의 소재지인 춘천을 중심으로 활동한 항일 의병투쟁을 말한다. 춘천의병의 항일투쟁은 1896년 양력 1월에 춘천부 유생 정인회(鄭仁會; 1868∼ 1902)가 관군 성익현(成益鉉)과 상인 박현성(朴玄成)을 포섭하여 일부구인과 포군 등 400여 명과 함께 개화정책을 강행한 춘천관찰부를 습격, 점령하고 관아를 임시 의병본 영으로 삼으면서 시작되었다. 이들은 단발한 개화초관 박진희를 잡아 처형하고 그의 머 리를 홍문(紅門)에 매달아 효수(梟首)해 놓고, 유수 재임시 공사를 핑계로 사욕을 채워 백성들의 곡물과 재물을 약탈 착취한 악명 높은 탐관오리 민두호(閔斗鎬; 1829∼1902)의 생사당(生祠堂)을 불지른 후, 그의 아들 민영준(閔泳駿; 1852∼1935, 후에 泳徽로 개명)의 집을 때려부수었다.
한편, 춘천의병들은 춘천부 관아의 공해문서(公?文書), 각방의 등록(謄錄)과 일과문부 (日課文簿)와 춘천부 재판소의 도류안(徒流案)과 각항문부(各項文簿) 등을 불질러 태우기 도 하였다. 이어서 춘천 봉의산 산성안에 의병진영을 설치하고 인근의 농민과 보부상 이 의진에 참여하여 더욱 확대되자, 춘천부 향유(鄕儒)들은 사과(司果) 이면수(李勉洙; 1833∼1898, 號 盤湖)를 중심으로 이진응(李晉應)·이만응(李晩應)·이경응(李景應)·이면 응(李冕應)을 참모로 구성하고 1월 20일에 당시 화·중·성·의문(華重省毅門)으로서 명 망이 높았던 이소응(李昭應; 1852∼1930)을 모셔와 대장으로 추대하여 춘천의진의 대장 소에서 군례를 받게 하고 의병대장에 취임케 하였다.
춘천의병은 신임관찰사 겸 선유사인 조인승(曺寅承)을 가평에서 체포하여 처단하 고 서울로 향하여 진격하였다. 그러나 가평 벌업산에서 관군과의 전투에서 패하고 말았다. 의병대장 이소응은 그의 종형·종제인 이진응·이경응에게 의진을 위임한 후 지평(砥平)을 거쳐 제천의병(堤川義兵)에 합류하여 항일투쟁을 계속하였다.

2. 이소응 의병부대


1) 봉기동인과 결성

춘천지역 전기의병은 일본의 조선침략 강화라는 객관적인 정세하에서, 정신적 상상 적 배경에서 화서 이항로의 존화양이 위정척사사상의 대외적인 화이관에서 척왜론을 강조하여 전개하였다. 투쟁방법에 있어서는 상소 자정수절(自靖守節) 등의 소극적인 대 응보다는 무력항쟁의 적극적인 방법이었다.
춘천지역은 존양위척(尊攘衛斥)의 사상이 강한 화서의 학통을 이은 중암 김평묵(重菴 金平默; 1819∼1891) 성재 유중교(省齋 柳重敎; 1831∼1893)와 그들의 문인인 남양홍씨 대제학 마천공파(노론계)의 홍재구 홍재학 홍재화 홍재문과 고흥유씨 부정공파(북인 계)의 유중악 유중락 유중용 유중홍 유중진 유홍석 유인석 유봉석 유의석 유 희석 유제원(柳濟元) 유제원(柳濟遠) 유제칠 그리고 고흥유씨 성재집안과 통혼한 전주이씨 경창군파(선조 구남) 화평군(花平君 ?)의 후예인 이면수 이소응 이진응 이만 응·이경응·이면응 등이 일찍부터 입향·세거하여 세력기반을 갖추고 있었던 고향이어서 보국양이와 위정척사의 분위기가 어느 곳보다 한층 격렬하였던 지역이었다.
북한강유역에서 전개된 화서의 민족주의적 실천사상운동이었던 의병운동은 일찍이 1866년 화서가 '의려책(義旅策)'을 개진할 때 전개될 가능성을 보여주었고, 1895년 을미 사변과 을미개혁의 위기상황의식에 대한 화 성 의·습문의 국가와 민족에 대한 위기의 식과 전통적으로 정치체제의 한 주체였던 사림이란 신분에서의 윤리적 위기의식에서 행 동화된 독자적 대응노력으로 전개되었다.
여기서 유인석은 을미사변의 국가변란과 단발령 시행과 같은 개혁정책으로 인한 민족 주체성인 자문화 단절의 위기상황에 직면해서 사림들이 처신하는 대응방비책이라고 볼 수 있는 「처변삼사(處變三事)」의 기본적인 행동강령으로 제시되었다.
大禍가 오늘에 이르렀으니 선비로서 처신할 방책 세가지를 제시하였는데, 첫째는 '擧義掃淸'으 로 義兵을 일으켜 倭賊을 소탕하는 것이요. 둘째는 '去而守之'로 故國을 떠나 海外에 가서 大義를 지키는 것이요. 셋째는 '自靖'으로 世上을 등지고 自靖하여 스스로 해결하는 것이니 각자가 자기의 뜻대로 쫓아서 할 것이다.라고 대비책7)을 제안하였다. 그는 이 세 가지 행동방법은 비록 형태가 다른 일이지만 그 의의는 모두 정당한 것이다. 그러니 각자 스스로에 따라서 갈 길을 선택하라고 주장 하였다. 그것은 모두다 유교의 의리와 도덕적 가치인 유도에 귀결되기 때문이다. 유인석은 당시 양모 덕수(德水)이씨의 상중(喪中)(1895.10.사망)이었으므로 거의할 수 없었다. 다만 일제의 침략세력이 미치지 않는 요순고성(堯舜古城)으로 망명하여 의관과 예의를 보호 보존하고 전통문화를 수호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유인석은 얼마 후 "나라 의 원수를 갚지 못하면 신하가 될 수 없고, 신체를 보존하지 못하면 사람이 될 수 없 다"는 생각에서 수의책를 포기 거의책을 결심하여 춘추대의와 복수토적의 명분을 내걸 고 살신성인·사생취의를 도덕주체로서 실천의 길을 택할 수밖에 없었던 유인석의 결심 은 북한강유역을 비롯하여 남한강유역의 원주 지평 제천의병으로까지 화서문인의 화 성 의문 유생의병장들이 주도세력을 이루고 전기의병활동을 전개하게 된다. 당시 양평 용문산에서 미리 회동하여 거의를 준비하였던 유중교계열들은 을미개혁의 단발령 이후 김평묵계열과 함께 자정(自靖)을 택하는 출처관으로 용문산에 은거하면서 처이부지(處而扶持)하려 했으나, 유인석의 서신도 받았고 유중악(초명, 重鼎)의 권고로8) 마음을 다시 돌려 출이부지하고자 유중악 유봉석 이소응 등이 비밀리에 거의를 의정 하여 사발통문과 격문을 통해 여론 분위기를 조성, 거의에 참여토록 유림세력을 규합하 였다.


2)춘천의병대장 추대 및 조직편성

춘천향유인 李守春 閔泳文 閔泳大 姜明洙 睦昌臣 進士 姜義八 父子 등과 士人 鄭仁會·李壽春, ?吏 朴致祥·朴善裕 등이 從事 직책을 맡아 도왔으며, 參奉 南世昌 縣監 吳揆泳 監察 崔萬淳 등은 각기 累千金을 의병 군자금으로 희사하였다. 마침내 監役 洪時承은 山內9)에서 檄文을 내걸고, 이소응의 從叔祖 司果 李勉洙(1833∼1898, 號 盤湖) 는 山外에서 통문을 돌려 인심을 격동시켜 의병규합에 호응하도록 하였다. 이렇게 의병진영이 구성되자 춘천의진을 통솔할 지도자가 없어 의병을 주창한 정인회 ·박현성·이수춘과 이면수·유중악·유중락·이진응·이만응·이경응은 당시 화·중 성 의문으 로서 명망이 높았던 이소응을 모셔와 춘천의병의 대장소에서 군례를 받고 의병대장에 취임케 하였다.
의병대장 이소응은 1895(乙未)년 12월 6일(양1896. 1. 20.) 정인회 성익현 박현성 등 과 이면수·이진응·이만응·이경응·이면응을 참모로 구성하고 춘천의병 진영을 새로 조직 하니, 장관·종사 100여명에 총군 1,000여명이며, 민군(民軍)은 일만 여명이었다. 습재 이 소응은 모든 의병을 모아 놓고 토적복수(討賊復?)의 동맹을 약속하고, 이미 정한 군제 에 새롭게 군율과 율령상벌 조목을 제정하고 춘천의병 편제10)를 다음과 같이 편성하였 다.


▽ 1895년 춘천의병 편제

上 將·義兵大將 ː 習齋 李昭應
亞 將 ː 九樵 李晩應
軍師將 ː 盤湖 李勉洙(武科 司果)
先鋒將 ː 李載豊(楊州人)
突擊將 兼 監軍事 ː 朴賢(玄)成
前軍將 ː 李冕應
前軍副將 兼 運糧使 ː 申在喜(加平人)
前軍謀士將 ː 李明菴
謀士將 ː 黃 鎭
召討將 ː 洪允令
巡撫將 ː 李晦(景)應
守城將 兼 運糧使 ː 各邑 地方官
率兵執事·都摠隊長 ː 哨長 成益賢
敎鍊執事 ː 李用俊
軍器執事 ː 全致弘
運糧使 ː 黃永鎭
參 謀 ː 李守春 等
別從事 ː 閔聖元·尹英信
從 事 ː 李斗彩·安 奭·李東國·韓喜玉·
鄭登龍·睦昌信·朴敎錫·朴閏信
李載(培)仁 等
募兵軍官 ː 金順善·金太玉·黃 更
率兵執事 ː 陳文三·崔東漢
率兵都摠使 ː 成益賢
按察軍中事 ː 李晦(景)應
譏察軍官 ː 朴 錫
軍 卒 ː 沈奇澤
春川募軍丁官 ː 柳重洛·任粲玉
加平募砲兵官 ː 李忠應
楊口募砲兵官 ː 李大有
狼川募兵官 ː 鄭夏玉
麟蹄募兵官 ː 金安裕
楊州募兵官 ː 池德成
砥平陣將 ː 崔台憲(洪川人)
洪川陣將 ː 南宮?(洪川人)
橫城陣將 ː 權大衡(橫城人)
鐵原陣將·自稱大將 ː 兪鎭奎(鐵原人)
永平·抱川陣將 ː 金顯龍(永平人)

습재 이소응이 의병대장에 취임하면서 의병 3,000여명의 춘천의병진영을 새롭게 편제 정비하고 다음과 같은 창의격문〈檄告八道〉를 전국팔도에 보내 인심을 격동시켰다.

지금 倭奴가 창궐하고 국내에 賊臣(필자:개화파)이 그들에게 붙어 國母를 弑害하고 임금의 모발을 강제로 자르기까지하며, 만백성을 모아서 개나 양(犬羊)의 무리속에 빠트리게 하며, 堯舜과 孔子 朱子의 道를 쓸어 없애려 하려하니 皇天上帝는 위에서 진노하시고 온 군대와 백성 들이 不共戴天의 원수로 생각한다. 무릇 우리 곳곳에서 봉기하는 忠義의 장수들은 中華를 높히 고 夷狄을 물리치며 국가를 위해 원수를 갚고 치욕을 씻는 것으로 제일의 大義로 삼아야 한다. 의병이 이르는 각영 각읍의 장관으로서 만일 자기 일신의 편리할 것을 생각하여 관망하며 곧 호응하지 않는 자나 적의 편에 붙어서 군정을 방해하는 자가 있다면 이들은 모두 夷狄禽獸의 앞잡이요, 난신적자의 徒黨이니 단연 軍律을 시행하여 먼저 베고 차후에 보고할 것이다.11)

춘천의병장에 취임한 이소응은 춘천 봉의산에 제단을 설치하고 '거의서천제(擧義誓天祭)'를 지내고 관아를 타파하여 군자금으로 쓰기 위해 공전을 빼앗았으며, 각 면의 부호 들에게 군량을 징발하고 군기고를 열어 일반 민병에게도 조총 등의 무기를 주어 밤낮으 로 의병훈련을 시켰다. 그리고 1월 26일(음 1895. 12. 12.) 춘천의병 대장소의 이름으로 인근 관읍에 "의병의 군수경비용이 시급하니 각 고을에서 납입해야 할 호포전 및 조세 를 밤을 세워서라도 납입하라"는 군수전의 납부를 독촉하는 통문을 보냈다.


3. 춘천의병 서울진격작전
습재이소응이 이끄는 춘천의병은 더욱 기세가 높아져 2월 1일 서울 진격을 목표로 하여 출동하였으나 정부에서는 이미 가평읍을 점거하고 가평읍의 앞산(案山)인 벌업산 (寶納山)에 진영을 치고 춘천의병을 진압하기 위하여 관군 친위대 제1대대장 참령 이남 희와 중대장 신우균과 그리고 친위대 제2대대 중대장 이겸제, 김구현 등이 지휘하는 관 군의 병력과 가평에 선발대로 보낸 박현성 의진과 가평지리가 밝은 가평의병장 이충응 (李忠應)이 지휘하는 신재희(申在熹) 성익현(成益鉉) 정문위(鄭文緯) 심능욱(沈能昱) 신관휴(申觀休) 신경홍(申敬弘) 등이 거느린 가평의병과 합세하여 한나절동안 대항하였 다. 신우균 중대와 교전한 박현성 의병진은 승승장구하여 관군병 사상자 50여명이나 되 었고, 의병도 10여명이 전사하였다.

2월 2일 하루동안은 관군과 춘천 가평의병은 접전을 피한 채 서로 방포하며 시위로 일관하였으나 2월 3일에는 비가 내려 화승총을 지녔던 의병들이 사용하지 못하는 틈을 타서 신총을 지니고 있던 관군에게 총공격을 당하여 벌업산을 점령당하였다. 패전하여 퇴각한 춘천의병들은 다시 의진을 가다듬고 포군을 보충하기 위해 춘천의진을 이소응의 종형인 이진응과 종제 이만응 이경응에게 맡겼는데, 이진응은 1896년 12월 25일 약사 원 후록에서 싸우다가 순국하였고, 이경응은 다시 형 뒤를 이어 의병대장이 되어 소양 강변의 봉의산을 거점으로 의세를 만회하려 하였으나 의진을 갖추기는 미흡하였다. 이경응은 남은 춘천의병 2백명을 인솔하고 강릉 민용호(閔龍鎬) 의진에 합류하여 양 구 강릉 등지에서 활동하였다. 그 후 춘천의병은 마지막 6월 하순에 제천의 유인석 호 좌의병진영에 합류하여 장기렴·심의섭이 이끄는 관군과 대항하였다. 그러나 서울에서는 고종의 아관파천으로 친일내각이 붕괴, 친로내각이 들어서자 단발 령도 취소되었다. 따라서 정부는 아관파천 당일 1896년 2월 11일 조칙을 내려 의병해산 을 다음과 같이 선유하였다.

이번 春川 등지의 人民들이 소동을 일으킨 것은 斷髮한 일 뿐만 아니라, 무릇 8월 20일 사변 에 쌓인 분노가 끓어오른 것이 단서가 되어 폭발한 것을 묻지 않아도 분명히 알지마는 이제 國賊이 처단되고 나머지 무리도 차례로 다스릴 터인 즉 그 때에 소요하던 사람도 반드시 들어 알고 분함을 씻으리니 그 곳에 주둔한 군대는 모름지기 먼저 이 조직을 가지고 春川府에 모여 있는 사람들에게 제시하여 각기 돌아가 生業에 종사케 하고, 무릇 그 頭目 이하를 모두 불문에 부쳐 모두 함께 維新토록 하며, 너희 軍隊의 大小 武官과 兵卒은 즉시 還軍하라.

이에 유중락 유홍석 김경달 최태헌·남궁영 등이 이끄는 의병들은 북한강유역의 청 평천 동네 어귀 태령을 넘어 가평지역에서 항전하다 유중락과 유홍석은 1896년 2월 17 일(음1.5.) 제천 유인석 의진에 합류하였고 이소응·이진응·이만응·이경응·이면응의 춘천의 병진은 지평의진장 최태헌 등과 동맹지의를 맺고 함께 맹활약하였다.
유홍석은 유인석 의병부대가 제천 수성전에서 장기렴의 경군에 패하여 서북대행군을 결행하자 약 240여명의 의병진과 함께 총의병대장 유인석을 따라 초산(楚山)을 거쳐 요 동 회인현으로 들어가려다 회인현 현재(縣宰) 서본우(徐本愚)가 의병해산을 요구하였다. 그러자 유인석은 눈물을 머금고 혼강인 피저강변(波?江邊)에서 그때까지 천신만고의 갖은고생을 겪으면서 함께 항일투쟁한 의병들을 무장해제 시키고 21명만 남기고 나머지 219명은 귀국토록 조치하였다.

이로써 유인석의 제천의병 활동이 의병대장으로 취임한 2월 8일부터 의진을 해산하는 9월 28일까지 7개월 20일간(233일) 활동기간은 종료되었으며, 유홍석과 유인석은 이후 장기 지속적인 항일투쟁 형태로 그 방향을 전환하게 된다.
유홍석과 유인석은 의진을 해산한 뒤 청에 군사원조를 요청하기 위해 유홍석 등 21명 과 함께 심양(瀋陽)으로 들어갔다. 의암 유인석은 원용정·박정수 등에게 구원요청서신의 글을 주어 원세개에게 보냈으나 만족할 만한 반응을 얻어내지 못하였다. 이에 유홍석과 유인석은 청국에 대해 원병요청 계획을 포기 단념하고, 일단 한국인이 많이 이주하여 집단으로 거주하고 있는 길림성 통화현 오도구에 정착하면서 항일투쟁을 위한 재기 근 거지로 구축하려 하였다. 그들은 이곳에다 '열성조종'의 망국단(亡國壇)과 '원근조상'의 망묘단(望墓壇)을 설치하고 정기적으로 참배하면서 이주민들의 애국의식을 고취하는 등 구국을 위한 정신적 무장을 한층 강화하였다.14)
그러나 1987년 음력 10월(양력 11월) 고종으로부터 귀국하라는 칙유를 받고 유인석은 일시 귀국하였으며, 유홍석은 고향 춘천 가정리에 와서 후학지도에 전념하게 된다. 그러 나 유인석은 제천의병에 처단되었던 전 단양군수 권숙(權潚)의 아들과 전 충주관찰사 김규식(金奎植)의 아들 등이 아버지의 원수를 갚겠다고 유인석 암살을 기도한 사건이 발생하였다. 유인석은 이사건을 계기로 다시 서간도 망명을 결심하고 1898년 윤3월 통 화현 오도구로 2차 망명하여 10월에는 오도구를 떠나 통화현 팔왕동으로 이주하였다. 이곳에서 1900년 의화단 사건으로 인하여 강계로 내려올 때까지 약 2년 동안은 주로 저술활동에만 전념하였으며,15) 그리고 가정에서의 '孝悌'와 국가에의 '忠順'을 덕목으로 하는 향약을 실시하는 등 이주 한인들의 교화에 힘쓰기도 하였다. 뿐만 아니라 공자·주 자·우암·화서·중암·성재의 영정을 봉안하는 성묘를 세워 이국 땅에서의 항일투쟁을 위한 정신적 귀의처로 삼았다



1. 후기 춘천의병 개황

1)후기의병 봉기원인

고종은 한국병탄에 대한 일본의 야욕을 한국정부나 국민의 힘만으로는 도저히 저 지할 수 없음을 깨닫고 국제 정의에 호소하여 열강의 여론이나 간섭에 의한 국권회복(國權回復)을 기도하였다. 그리하여 미국·러시아 등 각국에 여러번 밀사(密使)를 파견하면서 일본의 한국침략상을 낱낱이 폭로하고 한국에 대한 구원을 호소하였는 데 그 중 큰 것이 '헤이그' 밀사사건(密使事件)이었다.

고종은 당시 네덜란드의 수도'헤이그'에서 제2회 만국평화회의(萬國平和會義)가 열린다는 소식을 듣고 이상설(李相卨)·이준(李儁)·이위종(李瑋種) 등 3인을 밀파하여 회의에 참석토록 하였다. 이에 1907년 6 월 25일 그곳에 도착한 이들은 평화회의에 참석하려고 온갖 노력을 경주하였으나, 국제세력 관계와 일본측의 방해로 인하여 뜻을 이룰 수가 없게 되자, 부득이 신문기자들에게 일본의 한국 침략상을 낱낱이 폭로하고 한국을 지원해 줄 것을 호소하게 되었다. 이것을 '헤이그'밀사사건이라고 한다.

이 사건은 동년 6월 말경에 일본정부에 보고되었고, 7월 2일에는 이또오(伊藤博文)에게도 알려 왔다. 한편 일본정부에서는 7월 12일에 회의를 열어 밀사사건에 관 한 책임을 묻고, 일본정부가 앞으로 한국내정의 전권을 장악하기로 결정하여 그 실 천방법으로서 한국 황제로 하여금 황태자에게 양위하게 할 것 등을 이또오통감(伊藤統監)에게 지령하였다.

이에 이또오은 내각총리대신 이완용(李完用)을 불러 고종의 양위를 즉시 강행토 록 압력을 가하였고, 이어 이완용 등 내각대신들은 7월 16일 밤부터 18일 밤까지 매일 입궐하여 고종을 협박하고 양위를 서둘러댔다. 고종은 할 수 없이 19일 새벽 에 황태자로 하여금 국정을 대리케 한다는 조칙을 내리고 말았다. 물론 황태자의 대리 집정이 양위한 것과는 다르나 친일내각과 일본인의 강압에 못이겨 황태자의 황제 즉위식이 거행되었던 것이고 보면, 이는 곧 고종이 퇴위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제 고종의 퇴위는 그 간에 일본의 한국 침략행위를 완강하게 저항해 온 국부 (國父)마저 물러나고, 순종이 즉위했다는 사실도 중대한 일이거니와, 그 보다도 외 세의 강요에 의하여 타의로 국왕이 퇴위 당하였다는 자체가 조선 멸망의 마지막 단 계를 의미하는 것이었으며, 이로서 고종 퇴위는 마침내 세 번째로 크게 일어나는 의병항쟁의 요인이 되게 되었다. 그리하여 전국 각지에서는 다시 의병이 봉기하여 한말의병항쟁 가운데서 가장 격렬한 반일투쟁을 전개케 되었다. 이때의 의병이 1907년 정미년(丁未年)에 기의하였기 때문에 대개 정미의병(丁未義兵)이라고 부르고 또 이를 제3기(후기)의병(제5단계: 1907. 8∼1908. 5 ; 제6단계: 1908. 6∼1909. 10)이라고 도 한다.

상술한 바와 같이 정미의병은 고종의 퇴위사건을 계기로 야기되었다. 그것은 정 미7조약(丁未7條約)의 체결이나, 군대해산이 있기 이전인 7월 22일에 이미 경기도 안성군에서 약300명의 의병이 일어난 것이다. 그러나 정미의병이 본격적으로 폭발 하여 전국적인 규모로 확대된 것은 정미7조약의 체결과 군대해산이 강행된 이후부 터 였다. 즉 7월 24일 일본측은 법적인 요건도 갖추지 않고 강제로 정미7조약(韓日新協約)을 조인토록 하여, 한국의 전권을 일본인들이 장악함으로써 차관통치가 시 작되자, 가뜩이나 고종의 퇴위로 분개하고 있던 민심은 고조되고 있었다. 그 뿐만 아니라 7월 31일 일제가 작성한 군대해산의 조칙을 순종으로부터 재가받 은 형식을 취하여 1897년 2월부터 친위대중에서 선발한 군인으로 시위대(侍衛隊)를 신설한 후, 1905년 4월 중앙군인 시위대와 친위대를 통합하여 이름뿐인 1개 시위혼 성려단(衛混成旅團, 총 4,706명)으로 감축시킨 서울 시위대를 훈련원에 집합시켜 해산식을 실시하였고, 8월 3일부터 9월 3일까지의 한달 사이에 지방 진위대(鎭衛隊)의 해산을 감행하였다. 그러므로 황실시위대(皇室侍衛隊)의 극소수만을 남겼을 뿐, 이 제 한국군대는 완전히 해산됨으로써 사실상 군대없는 나라가 되었다. 따지고 보면 한 나라의 군대는 적어도 그 나라의 주권과 그 백성의 자위를 위해서 존재하는 것 이요, 이를 위한 최후의 보루임에도 불구하고 군대가 해산되었다는 것은 어떻게 보 거나 국가의 멸망을 뜻함이었다. 그러므로 일제가 이를 강행하였다 함은 그들이 장 차 한국을 병탐하겠다는 뜻을 분명하게 밝힌 것이며, 때문에 이 지경을 당하여 의 병의 봉기는 참으로 자연스럽고 당연한 것이었다.

구한말(1905년 4월)의 총병력은 서울에 있던 시위대와 친위대를 합친 4,706명 (1905년 4월 현재)과 지방에 있던 지방의 진위대 2,434명,그리고 특수부대(헌병대·여 성학교·무관학교 등)병력 500여명을 합한 총7,600여명 정도에 불과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위 정미비밀각서(丁未秘密覺書)에 따라 그나마 유명무실했던 한말군대 조차 없애려고, 이또오는 우선 8월 1일을 기하여 서울 시위대의 해산을 단행하려 하였다. 이를 눈치챈 한국군 시위대 2개 대대 (제1·2연대 각 1대대)는 박승환(朴昇煥) 참령(제1연대 1대대장, 현 소령)의 자결에 분기하여 무장해제는 커녕 일본군과 치열한 전투까지 벌여 피차간에 많은 사상자를 내었다. 결국 이 전투는 전국적으로 의병항쟁의 신호가 되어 각지로 파급되어 갔다. 결국 이 때 서울시위대의 항쟁은 일본군보다 열세하여 이겨내지 못했으나, 그 해산병들은 각 지방으로 흩어져 서울 의 사태를 알리는 동시에 해산된 지방진위대 군사들과 더불어 의병에 가담, 합세하 여 그 주력을 이루면서 활동하게 되었다.

황현(黃玹)은 "그들이 곧 성밖으로 달아난 자는 모두 의병에 합류하였다"고 하였 고, 송상도(宋相燾)는 "남은 군인들은 각자 흩어져 팔로(八路) 의병이 다시 일어난 것은 이로부터였다"고 하였으며, 일본군의 자료에서도 "해산된 군인의 대부분은 지 방으로 도망하여 폭도(暴徒: 義兵)의 무리에 뛰어들어 오랫동안 화란(禍亂)의 불길 을 종식시키지 못하게 한 원인이 되었다"고 기록하였다.

그리하여 당시의 정미의병항쟁(丁未義兵抗爭)은 갑오(甲午)·을미의병(乙未義兵)이 나 을사의병(乙巳義兵)에서와 같은 민병(民兵)만의 항쟁이 아님은 두말할 나위가 없 다. 한편 지방진위대 중에서도 원주나 강화 등의 몇 군데에서는 해산군인세력이 유 난스러웠다. 이 가운데서 특히 원주진위대의 경우는 해산을 위한 일본 감시군이 오 기 전에 무기를 가진 채 미리 봉기함으로써 여러 의병부대보다도 그 주력을 이루었 다.

이로써 후기(제3기)의병은 고종의 퇴위와 정미7조약 그리고 한국군대의 해산으로 말미암아 봉기하였으며, 때문에 의병목적을 '국권방위(國權防衛)'에 두고 있었다. 이 는 원주에서 재기한 이인영(李麟榮)이 각도 의병장들의 추대를 받아 전국 13도창 의대장에 오른 동시에, 원수부를 설치하고 서울 진격을 위해서 의병통일체의 연합 의병부대를 편성하여 국제법상 교전단체로 내세운 정미의병의 의거목적에서도 족히 알 수 있다.

한말의병은 제1기 의병의 목적을 '국수보복(國讐報復)'에 두었고 또 제2기 의병의 기의목적을 '국권회복(國權回復)'에로 부각되었으며, 제3기 의병에서는 창의목적을 '국권방위(國權防衛)'의 항쟁으로 전개시켜 갔다. 이때 후기의 정미의병은 전기 을 미의병이나 중기 을사의병의 의병처럼 명분과 의리를 내세우던 유자들과는 달리 실천에 중점을 두고 있었던 해산병이 합류하면서 그 핵심적 이념이 되고 있었다. 따라서 정미의병항쟁은 전투능력이 과거보다 월등하게 높아졌으며, 또 의병의 병 수(兵數)로 보거나, 조직에 있어서도 지난 제1기나 제2기보다도 훨씬 규모가 컸던 것이므로, 오묘한 기습과 치열한 전투를 전개할 수 있었다. 다시 말해서 정미의병은 갑오·을미의병이나 을사의병과 같이 민병만의 항쟁은 아니었다. 이는 관군으로서 지 난날 의병을 탄압하던 해산병이 일어나 민병인 의병과 합세했던 까닭에 정미의병 (제3기 의병)은 을미의병이나 을사의병과는 대열의 구성 또는 성격면에서 다양성을 지녔고, 역시 전투면에 있어서도 치열하고 장기적인 "피의 항쟁"을 벌여 한말의병 의 극치를 이루게 되었다.

정미의병 당시 강원도 지역에서 활약한 의병장과 의병부대는 민긍호 의병부대, 이강년 의병부대, 지용기 의병부대, 유홍석 의병부대, 이인영(李麟榮)·이은찬(李殷瓚) 의병부대, 허위(許蔿) 의병부대, 왕회종(王會鍾)·김주묵(金湊默) 의병부대, 그리고 연 해주(沿海州)에서 의병활동의 의맥(義脈)을 이어간 유인석 의병장이 있다. 그 중에 서도 특히 격렬하게 항쟁한 민긍호·이강년·이인영 의병부대가 대표적이다. 그 밖에 도 최영석(崔永錫)·인찬옥(仁燦玉)·최천유(崔千有) 의병부대, 강릉부근에서 박장호(朴長浩)·최돈종(崔燉鍾) 의병부대, 울진부근에서 성익현·정경태(鄭敬泰)·신돌석(申乭石)· 박준성(朴準成) 의병부대, 인제부근에서 손재규(孫在奎) 의병부대, 박여성(朴汝成) 의 병부대, 금강산 장안사 일대를 근거지로한 고중록(高重錄) 의병부대, 춘천부근에서 이인재(李寅在) 의병부대, 삼척부근에서 변학기(邊鶴基)·김운선(金雲仙) 의병부대들이 상호 연락하에 일본군과 치열한 의병항쟁을 전개하였다.



1. 유홍석 의병부대 활동

북한강유역의 1907년 이전의 중기의병은 활발하게 활동을 하였던 것은 아니지만 끊임 없이 계속하여 의병봉기를 하였으며, 그의 배경은 1905년 을사늑약의 체결로 일제가 한 국으로부터 외교권을 박탈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북한강유역의 의병들은 거의목적 을 을사5조약의 파기, 즉 국권의 회복에 두었던 것이다.
북한강유역의 중기의병의 특징과 성격은 1905년의 참여한 의병장들과 의병구성원을 분석해 보면 대체로 1895년의 전기의병에 참여하였었거나, 그들과 관련된 인물들이 보 인다는 사실이다. 1907년 춘천의 후기의병은 고종의 퇴위사건을 계기로 야기되어 정미7조 약의 늑결과 군대해산이 강행되자 외당 유홍석을 중심으로 재기하였다. 1896년 1월 춘천 의병의 이소응과 함께 북한강유역 가평과 청평천 일대에서 선전하였던 유홍석은 춘천의 진이 상실하게 되자 제천 유인석의진으로 합세하여 제천의진의 군무를 주재하였고 「국 조의 세덕을 밝힘」·「왜추의 심적을 밝힘」 등 '고병정가사(동산문화재)' 210여 편을 지 어 춘천 후기의병활동을 진작시키는데 힘썼다.

1905년 11월 을사5조약이 일제의 불법적으로 맺은 결과, 1907년 7월 고종 퇴위사건과
정미7조약(한일신협약) 그리고 8월의 군대해산 등이 강행되자 북한강유역 상류인 홍천 에서 박장호와 양평·가평의 의병장 김노수 등이 기병하였으며, 춘천의 유홍석은 진위대 해산직후 유중악등과 모의하고 발산리 항골(恒谷)에서 유하석(柳夏錫)·유봉석(柳鳳錫)·유 태석(柳台錫)·유영석(柳寧錫)·유제곤(柳濟坤)·박선명(朴善明)·박화지(朴華芝)·최영석(崔永錫)· 김정삼(金正三)·길정희(吉熙貞) 등과 더불어 의병 600여명을 모집하여 춘천 진병산, 가평 주길리 등지에서 일본군과 치열한 혈전을 벌였다. 이 전투에서 유홍석은 부상당하고 9 월 26일(陰 8.19) 유하석·유영석 등이 전사하는 등 패전하였다.

그러나 이때 군자금과 탄약, 군량이 부족하자 유중악은 제일먼저 농우(農牛)를 내놓았 고,17) 춘천의병진영의 윤희순 여성의병장은 화·중·성·의문의 고흥유씨 아내와 춘천지역 향촌민의 아내들로부터 군자금을 모아 춘천시 남면 가정리 여의내골에서 놋쇠와 구리 등을 구입하여 무기와 탄약을 제조 공급하였으며, 의병훈련에도 협조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춘천의병은 관군에 비하여 장비가 너무나도 열세하여 가평 주길리 전투에서 패하자, 유홍석 의병장은 잔여의병을 정비하여 김노수 의진에 맡기고 자신은 부득이 제천 장담리에 머물면서 다시 재기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각처의 의병이 이미 흩어져 있었으므로 끝내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유홍석은 그 후 1910년 일본의 병탄으로 국권이 상실되자 가족의 만류로 자정치명하 려던 뜻을 고쳐 1911년 이소응 등 종족·사우들과 함께 압록강을 건너 요동 흥경현(興京縣) 평정산(平頂山)으로 망명하여 가족을 관전현(寬甸縣)에 머물러있게 하고 유홍석은 유인석·이소응 등과 함께 의병일에 종사하니 일시일각이라도 의병을 잊는 일이 없고 본 토진공의 방략을 모색하다 본토회복의 대의를 펴지 못하고 회인현 대아하(大雅河) 춘유 두(春柳頭) 남산에서 유인석 보다 2년 먼저 1913년 음력 12월 21일에 73세로 머나먼 이 국 요동땅에서 세상을 마쳤다. 그후 1930년 장손 돈상(敦相)이 고향인 춘천 남면 관천리 에 반장(返葬)하였다.

2. 지용기 의병부대 활동

지용기(池龍起, 본명 弘敏)는 춘천시 서면 방동리(芳洞里) 출신으로 춘천군 향리 (鄕吏)였다. 춘천 전기의병 당시 춘천의병에 참가하였고, 제천의진으로 옮긴 후 서 북대행군 때 낭천(狼川:華川) 전투에서 떨어져 그후 줄곧 춘천·화천·양구 일대에서 의병할동을 벌였다. 1907년 8월 지용기는 화천군 사내면 사창리(당시 춘천군)에서 800여명을 모아 춘천으로 진입할 것을 계획하고, 우선 가평을 급습하여 군수 염규 식(廉圭植) 등 10여명을 회유하여 경기·강원도의 도계이며, 춘천·가평군의 군계인 싸 리재를 넘어 춘천군 방동리에 대장소(李俊容의 집)를 설치하고 380여명으로 포진하 고 있었다. 그러나 밀고를 받은 왜병 60여명이 동 11월 3일 아침 덕두원(德斗院) 방 향에서 기습을 하여 혈전을 벌였으나 마침내 지용기 이하 14명이 순국하고 20명이 생포되었다. 이 싸움에서 왜적의 대장 가마다(鎌田)대위가 죽고, 여러 명이 살상되 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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