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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춘천여성의 의병조직

춘천의병의 전기의병에 있어서 춘천지역 항일 을미의병 당시 의병활동을 적극 후원하 였던 윤희순 여성의병장은 북한강유역 여성의병의 대표적인 인물로서 후기의병에는 參判宅, 藥岩宅, 南宗宅, 恒谷宅, 佳亭宅, 愚溪宅, 盤湖宅, 蘭谷宅, 旺洞宅, 漢浦宅, 八峰宅1) 등 화·중·성·의문의 아내인 여성 76명을 규합, 춘천지역 여성의병 부대를 조직하여 군자 금 355兩 8錢 5卜을 모금하여 춘천의병의 항일투쟁활동에 적극적으로 지원하였다. 춘천 여성들이 조직한 의병부대는 윤희순 여성의병장과 함께 춘천 후기의병활동에 적극 참여 하였다. 참여한 여성의병들의 자료에서 택호를 분석,2) 군자금 명단과 지원한 군자금액, 그리고 군자물자 지원 및 기타사항 등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 윤희순의 군자금 명단에 기록된 택호와 금액(附, 의병물자지원 여성)

1. 南宗宅­20兩ː南宗宅은 加平郡 北面 所法里 楠宗에서 거주하다 시집온 柳濟友夫人 晉州河氏로서 乙未義兵에 참여한 柳重軫(1862∼1926) 長姪, 晦錫의 둘째子婦이다.

2. 恒谷宅­15兩ː황골댁은 桂陽宅 작은집으로서 强齋 柳重龍의 조카이며, 義軒 重鳳 의 長男 柳心錫(1871∼1924)의 夫人 咸安李氏(1873∼?)이다. 심석은 부모의 孝道와 사람됨됨이와 氣量이 있어 忠誠이 두텁고, 義로움을 행하여 鄕土史에 나타나 있다.

3. 桂陽宅­3兩ː계양댁은 본래 重菴·省齋門人 强齋 柳重龍의 父 通德郞 馥(1818∼ 1881)의 號가 桂陽으로서 夫人 杞溪柳氏(1816∼1887)의 宅號로 사용되어 그 후 强齋 夫人 楊州趙氏1844∼1897), 長子 賢錫(1869∼1942)의 부인 東萊鄭氏( 1882∼1917) 등 계양댁 며느리들이 계속 사용해 왔던 宅號이다. 여기서는 强齋 며느리 동래정씨를 지칭하는 것이다.

4. 桂陽小宅­10兩ː桂陽 通德郞 馥의 仲子이며, 强齋 柳重龍의 동생 義軒 重鳳(1848∼ 1924)의 夫人 南陽洪氏(1848∼1916)이다. 柳重鳳은 집안과 항일의병투쟁을 위하여 敦 親好賢하고 扶義施財한 인물이기도 하다.

5. 桂陽小宅­1兩ː桂陽 通德郞 馥의 季子이며, 柳重龍의 막내 동생 華谷 重龜(1851∼ 1924)의 夫人 南原梁氏(1848∼1905)가 본래 계양소댁 이였지만, 여기서는 華谷의 子 婦, 璟錫(1873∼1958)夫人 平山申氏(1873∼1959)이다.

6. 盤湖宅­2兩ː毅菴 柳麟錫의 生家 친동생 汕? 柳夏錫(1849∼1907)의 며느리이며, 濟弼(1874∼1942)의 夫人 安東權氏(1871∼1945)이다. 안동권씨는 華西문인이면서 重 菴·省齋門人인 小溪 權一善(1852∼1930)의 따님이다. 媤父 유하석은 1895년 을미의 병 때 유인석 제천의진에서 활동했으며, 서북대행군 때는 毅菴과 동행하였다. 1907년 정미의병이 일어나자 12월 3일(음10.28.) 일본군에 체포되어 참살되었다.

7. 蘭谷宅­10兩ː內部主事를 역임한 斗元 柳晉錫(1845∼1903)의 夫人 順興安氏(1867∼ 1945)이다. 蘭谷宅 순흥안씨는 성품과 행실이 淸廉絶異한 女性이었다.

8. 蘭谷小宅­1兩ː蘭谷宅의 작은집으로 柳泰錫(1847∼1879)의 夫人 驪興閔氏(1844∼ 1926)이다. 柳泰錫은 乙未義兵 春川義陣의 亞將 李晩應(1857∼1938, 號 九樵) 집안과 通婚하여 아들 李載儀(1877∼1950, 號 樂汕)를 사위로 맞았다.

9. 蘭谷小宅­1兩ː蘭谷宅 小宅으로 柳觀錫(1853∼1919)夫人 光州鄭氏(1853∼1940)이다.

10. 谷村宅­7兩ː골말댁은 柳鼎錫(1850∼1928)의 며느리며, 柳濟舜(1870∼1930)의 夫人 驪興李氏(1870∼?)이다.

11. 愚溪宅­4兩ː毅菴 柳麟錫의 生家 형님인 景淵 禹錫(1832∼?)의 며느리이며, 濟恒 (1853∼1945)의 夫人 全州李氏이다.

12. 愚溪小宅­1兩ː우계댁의 작은집으로 舜錫(1852∼1890)의 며느리이며, 濟常의 夫人 鎭川宋氏(1882∼1950)이다.

13. 愚溪上宅­紙1軸ː우계댁의 큰집으로 疇錫(1851∼1924)의 며느리이며, 濟七의 夫人 陽川許氏(1871∼1933)이다.

14. 佳亭宅­20兩ː가정댁의 宅號는 본래 佳亭 柳榮培(1751∼1822)의 부인 昌寧成氏 (1751∼1791)로부터 장남·장손들에게 계승되어 왔다. 여기서는 佳亭의 玄孫婦이며, 通仕郞 繕工監役, 醉隱 箕錫(1824∼1897)과 夫人 淑人 南宮氏(1823∼1904)의 며느리 從仕郞 中樞院 議官 濟元(1850∼1923)의 부인 驪興閔氏(1847∼1925)이다.

15. 佳亭小宅­10兩ː佳亭의 玄孫婦이며, 通仕郞 繕工監役, 醉隱 箕錫(1824∼1897) 동생 圭錫(1827∼1891)의 며느리 濟萬(1859∼1915)의 부인 晉州姜氏(?∼1920)이다.

16. 平山宅­10兩ː柳胤錫(1844∼1903)의 며느리 濟國(1862∼1913) 부인 水原白氏(1874∼ 1945)이다. 유윤석의 뚤째딸인 평산댁의 시누(1871∼1937)가 習齋 李昭應의 맏며느리 이며, 載仁(1873∼1945;一名, 培仁)의 부인이다.

17. 參判宅­20兩ː栗里 柳榮五(1777∼1863)와 甫山 柳榮河(1787∼1868) 모두 參判宅 號를 夫人들이 사용하였으나, 여기서는 乙未·丁未의병 모두 참가하였던 栗里의 系 曾孫 敬窩 柳鳳錫(1857∼1909) 夫人 迎日鄭氏(1856∼1925)의 宅號로 사용되었다.

18. 進士宅­5兩ː文科에 及第하고 弘文館 校理를 역임한 醉雲 柳輝錫(1854∼1931)의 父 親 漢北高士 信齋 柳重植(1828∼1905)이 1858년 戊午司馬試 進士에 入格하여 夫人 南陽洪氏(1831∼1902) 宅號를 進士댁이라고 하였다. 여기서는 校理夫人 全義李氏 (1867∼1921)를 지칭한다.

19. 藥岩宅­20兩 未納ː承訓郞 純陵(度祖妃)參奉 春溪 柳台錫(1858∼1933)의 夫人 穎陽 千氏(1869∼1938)이다. 약암댁은 千石君의 富裕했던 집안이기도 하며, 둘째 시누는 前期 春川乙未義兵 때 洪川義兵將으로 習齋 李昭應 義陣으로 砲丁 100여 명과 함께 참여했던 南宮?의 부인이다.

20. 藥岩小宅­10兩ː春溪 柳台錫 從兄 彦錫(1846∼1893)의 夫人 南原梁氏(1844∼1903) 이나, 맏며느리 坦齋 濟斗(1868∼1946)부인 原州 邊氏(1882∼?)이다.

21. 松山宅­1兩ː敬窩의 며느리 濟中(1879∼1951)부인 安東權氏(1878∼1919)이다.

22. 松山小宅­1兩ː敬窩의 작은며느리 濟正(1889∼1959)부인 靑松沈氏(1886∼1951)이다.

23. 虎鳴宅­1兩ː범우리(虎鳴)는 본래 가평군 남면 호명리였으나, 현재는 외서면에 소 속되어 있다. 범우리댁은 柳光錫(1870∼1931)부인 廣州李氏(1873∼1952)이다.

24. 墨內宅­1兩ː먹안이댁은 京畿道 加平郡 雪岳面 墨內里에서 柳氏家門으로 시집온 부인이나, 택호는 미상이다.

25. 濟救嶺宅­2兩ː제구령댁은 가평 북면 서쪽에 있는 濟救糧의 지명을 宅號로 사용한
省齋門人 柳羲錫(1959∼1882)의 夫人 咸悅南宮氏(1856∼1935)이다.

26. 斗山宅­3兩ː두산댁은 丁未義兵 柳弘錫 義陣에서 맹활약하였던 柳濟坤(1877∼1948) 의 夫人 鎭川宋氏(1875∼1914)이다. 두산댁을 텃골(垈谷)댁이라고도 한다.

27. 斗山小宅­1兩ː유제곤의 작은부인 高陽裵氏(?∼1945)이다.

28. 斗山小宅­1兩ː유제곤의 동생 濟澤(1892∼1951)의 부인 全州李氏(1892∼1955)이다.

29. 杏村宅­1兩ː행촌은 춘천 남산면 행촌리(살구나무가 많아 살구나무촌)의 지명이나, 宅號는 未詳이다.

30. 虎鳴宅­1兩ː범우리(虎鳴)는 본래 가평군 남면 호명리였으나, 현재는 외서면에 소 속되어 있다. 범우리댁은 柳光錫(1870∼1931)의 부인 廣州李氏(1873∼1952)이다.

31. 八峯宅­1兩ː洪川郡 西面 盤谷 小溪 權一善(1852∼1930)의 母親 南陽洪氏이다.

32. 湄源宅­1兩ː省齋宅 작은 집 柳重容(1871∼1910) 부인 咸悅南宮氏(1871∼1918)이다.

33. 秀峴宅­1兩ː垈谷派 柳憲錫(1854∼1918)의 夫人 楊州趙氏(1850∼?)이다.

34. 山內宅­1兩ː산안(山內)댁은 恒窩門人 健齋 柳濟東(1884∼1952)의 夫人 原州邊氏
(1882∼1945)로서 西面 錦山에서 시집왔다.

35. 花溪宅­1兩ː春川派 柳履錫(1861∼1926)의 부인 平海黃氏(1857∼1919)이다.

36. 酒原小小宅­1兩ː柳玉錫(1867∼?)의 子婦, 濟得(1888∼?)의 부인 原州元氏이다.

37. 驪州宅­2兩ː柳祐錫의 며느리 濟益(1877∼1944)부인 竹山朴氏(1879∼1950)이다.

38. 驪州宅­1兩ː柳祐錫의 며느리 濟益(1877∼1944) 부인 竹山朴氏(1879∼1950)이다.

39. 酒原小小宅­1兩ː柳玉錫(1867∼?)의 子婦, 濟得(1888∼?)의 부인 原州元氏이다.

40. 竹山宅­1兩ː柳元錫(1883∼?)의 부인 驪興閔氏(?∼1928)이다.

41. 南湖宅­5兩ː柳仁錫의 며느리 濟榮(1865∼1943)부인 坡平閔氏(1862∼1933)이다.

42. 山內宅­1兩ː산안(山內)댁은 愚溪派 柳正錫(1857∼1911)의 夫人 慶州李氏(?∼1962) 이다. 산안은 春川 西面 錦山을 지칭한다.

43. 旺洞宅­10兩ː旺洞派 宗家宅으로 柳仁錫(1840∼1894)의 며느리 濟榮(1865∼1943)의 夫人 坡平尹氏(1862∼1933)이다.

44. 旺洞小宅­1兩4錢ː柳仁錫의 작은댁으로 根錫(1835∼1907) 부인 全州李氏(1829∼?) 이다. 여기서는 孫婦인 俊相(1872∼1964)의 부인 慶州鄭氏(1871∼1924)이다.

45. 通谷宅­1兩ː통골댁은 垈谷派 작은댁으로 柳瀅錫(1855∼1929)의 子婦 濟榮(1881∼ 1945)의 부인 平壤趙氏(1881∼1954)이다. 통골은 춘천 남산면 지역을 지칭한다.

46. 漢浦宅­3兩ː省齋 柳重敎(1832∼1893)의 며느리 立軒 毅錫(1857∼1933) 부인 全州 李氏(1855∼1925)이다. 전주이씨는 習齋 李昭應의 누이동생이다.

47. 砥平小宅­1兩ː毅菴生家 再從弟 柳泳錫(1856∼1933)의 부인 平山申氏(1853∼1909).

48. 廣州宅­1兩ː毅菴生家 再從弟인 柳寬錫(1871∼1939)의 부인 淸州韓氏(1850∼1935).

49. 턱골댁(텃골·垈谷宅)­義兵軍糧穀物支援ː텃골(垈谷)은 柯亭里에서 博岩里가는 우 측으로 고란(皐蘭)터 북쪽에 있는 마을로서 텃골댁은 丁未義兵 柳弘錫 義陣에서 맹 활약하였던 柳濟坤(1877∼1948) 夫人 鎭川宋氏(1875∼1914)이다.

50. 벌골댁(버리골·보리골·牟谷宅)­義兵軍糧穀物支援ː벌골은 洪川 西面 보리울(牟 谷)의 지명으로 丁未義兵 柳弘錫 義陣에서 맹활약하였던 柳濟坤(1877∼1948) 친동생 濟龍(1882∼?)의 夫人 廣州李氏(1882∼1952)이다.

51. 정문댁(旌門宅)3)­義兵軍糧穀物支援ː恒窩宅으로 柳健錫(1869∼1940)의 夫人 全州 李氏(1866∼1912)로서 恒窩 柳重岳의 큰 子婦이며, 然五의 曾祖母이다.

52. 최골댁­義兵軍糧穀物支援·尹熙順女史와 男裝情報蒐集ː丁未義兵 柳弘錫 義陣에 참 가하였다가 9월 26일 加平 珠吉里 항일전투에서 전사한 柳寧錫(1875∼1907)의 夫人 原州 元氏(1874∼1932)이다. 이때 부인은 남편을 도우며, 윤희순 여성의병장과 적극적인 여성 의병으로서 활동하였다.

53. 의암댁(毅菴宅)­義兵軍糧穀物支援·尹熙順女史와 男裝情報蒐集ː毅菴 柳麟錫의 부 인 全州李氏(1875∼1951)이다. 의암댁은 강직하고 호탕한 성품으로 의암의 뒷바라지 와 윤희순 여성의병장과 적극적인 여성의병으로서 활동하였다.4)

54. 용문댁(龍門宅)­義兵軍糧穀物支援ː경기도 楊平 龍門의 용머리 집이나 未詳

55. 소리댁(松山宅)­義兵軍糧穀物支援ː소리(松山)댁의 소리는 가평군 설악면 송산리의 지명으로서 乙未·丁未의병 모두 참가하였던 敬窩 柳鳳錫(1857∼1909)의 夫人 迎日 鄭氏(1856∼1925)이다. 여기서는 敬窩의 며느리 濟中(1879∼1951)의 부인 安東權氏 (1878∼1919)를 지칭한다. 이때 迎日鄭氏와 며느리 安東權氏는 남편과 시아버지를 도우 며, 여성의병으로 윤희순 여성의병장과 함께 적극적으로 활동하였다.

이상과 같이 춘천지역의 항일 의병활동에서 윤희순 여성의병장과 여성의병들로 조직 된 춘천여성의병부대는 춘천의병진영의 지원부대로서 수집한 군량미로 의병들의 밥을 지어 먹이는 취사활동과 의병들의 의복 등의 빨래를 해주는 세탁활동, 탄약과 무기제조 등 후방에서 의병들의 뒷바라지와 양식·의류·군자금·탄약·무기 등 급양지원 활동을 하였 던 우리 나라 최초의 여성의병부대였다.



1. 윤희순 여성의병장 활동

윤희순은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시아버지인 외당 유홍석이 통탄을 이기지 못하 여 의암 유인석과 더불어 죽기를 맹세하고 대사를 동맹하자, 의암 유인석의 부인 전주 李氏(毅菴宅, 1875∼1951)·柳寧錫의 부인 원주元氏(최골댁, 1874∼1932)와 함께 남장을 하 고 정보수집까지도 하면서 여성의병장으로서 여성의병들과 정보를 춘천의병진영에 지원 하는 등 역할을 다각도적으로 항일 의병활동을 하였다.
특히, 윤희순 여성의병장은 앞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화·중·성·의문의 후기춘천의병 에 참여했던 의병장 아내들과 고흥유씨 집안내의 아내, 그리고 향촌민의 아내들로부터 군자금을 모아 가정리 여의내골에서 놋쇠와 구리 등을 구입, 탄환 등의 무기와 소변의 유황(소피적) 등을 모아 화약을 제조하여 공급하는 탄약제조소운영에 직접 참여하였으 며, 가정리 여성 30여명을 동원하여 의병훈련에도 적극적으로 협조하면서 직접 여성의 병장으로서 훈련도 함께 하였다.
그리고 춘천 각지역 항일 의병전투에서 패한 의병들이 돌아오면, 윤희순 여성의병장 과 여성으로 조직된 춘천여성의병대는 의병지원부대로서 수집한 군량미로 허기진 의병 들의 밥을 지어 먹이고 의복 등의 빨래를 해주는 등 의병들의 뒷바라지에도 힘을 기울 여 후방에서 의병들의 양식·의류·군자금 등 급양지원 활동을 활발하게 하였다.
강원의병의 특징중의 하나가 바로 큰 규모의 화약제조소가 운영된 점이다. 강원도내 화약제조소가 운영된 사례는 춘천시 남면 가정리와 양구군 방산면 등매리(登每里)의 두 곳이 확인되었다.5) 양구 화약제조소의 규모가 컸는데, 1907년 11월 20일 야간 일본군에 이를 발견 당한 즉시 대부대의 기습공격을 받아 초토화되었다.
양구 화약제조소는 설치시기가 정확하지 않으나, 의병장은 崔道煥·李順渠·金順光이었 고 의병규모는 300∼400여 명이었다. 이들은 인감을 사용하고 있었을 정도로 조직적으 로 활동하고 있었고, 각 면과 동에서 '화약세(火藥稅)'의 명목으로 자금을 모집하여 무기 와 화약을 제조하였다. 양구의병의 활동중에서 춘천의병과 마찬가지로 여성의병들이 참 여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는 무기·화약 등의 제조관련 문헌자료들을 살펴 볼 수 있다. 강원의병활동 속에서 북한강유역의 위와 같은 무기 및 화약제조소 운영과 탄약제조 활동은 강원여성들의 참여와 활발한 의병활동의 전개를 가능케 하였던 주요 배경 중의 하나였다. 그러므로 대규모의 항일투쟁은 이와 같은 전문적인 무기 및 화약제조소가 있 었기 때문에 가능하였다.


1)의병가 작사와 의병참여의식 고취

1895년 춘천지역 전기의병이 봉기하자 윤희순은 시아버지인 외당 유홍석과 남편 항재 유제원이 적극적으로 의병활동을 하자, "비록 여자라도 나라를 구하는 데에는 남녀의 구 별이 있을 수 없다"라고 하면서 우리 여성들도 분연히 일어나 의병을 앞장서서 스스로 돕자고 애국과 구국정신을 외쳤으며, 폐쇄된 양반사회의 가정에서 지내왔던 여성들을 일깨워 주기 위하여6) 「안사람 의병가」·「애달픈 노래」·「방어장」·「병정의 노래」· 「의병군가」·「의병가」·「안사람 의병가 노래」 등의 의병가사와 조선선비의 아내로서 「왜놈대장 보거라」·「오랑캐들아 경고한다」·「왜놈 앞잡이들아」·「금수들아 받아보거 라」와 같이 왜적의 만행을 규탄하는 포고문과 규탄문, 일제 앞잡이를 질책하는 경고문· 성토문을 지어 발포 게시하였으며, 의병가사를 지어 의병참여 권유와 의병가를 불러 젊 은 청년들을 의병에 참여하게 하여 애국과 충신이 되자고 하였고 의병에 참여한 의병들 의 사기를 진작시켜 격려하기도 하였다.
윤희순의 의병가 8편중에는 「방어장」에 '乙未年 十二月 十九日'과 「병정노래」에는 '병신춘작' 등과 왜놈들에 경고한 경고문 「왜놈 앞잡이들아」에는 '丙申年 七月 二十日' 등으로 기록되어있는 것을 보면 대개 의병가의 작품연대는 춘천 전기의병 시기인 1895 년부터 1896년에 일어났던 의병활동을 배경으로 창작되었음을 살필 수 있다.
의병가는 「병정노래」, 「의병군가1·2」, 「병정가」, 「안사람 의병노래」, 「안사람 의병가 노래」, 「애달픈 노래」, 「방어장」 등으로서 일반적인 의병가로서 춘천의병의 의 병과 여성의병인 안사람의병들이 부르도록 되어있는 노래이다. 특히 여성의 안사람 의 병가는 부녀자들이 부르도록 되어 있는 노래가사로서 춘천의병의 항일투쟁활동을 보고 구경만 하지 말고 의병들을 도와주자고 참여하자는 권유의 의병가이다. 그리고 「애달픈 노래」는 우리 나라의 현실을 탄식하는 노래로서 의병을 도와주고 참여하게 하는 노래이 고, 「방어장」은 우리지역 청년들에게 의병참여를 권유하고 사기을 북돋우는 의병가의 성격으로서 애국과 구국정신이 베어있는 노래이다.
윤희순의 의병가사는 언문의 옛 한글체로서 직접 지어 불렀고 항일의식을 고취하도록 보급하던 의병가를 기록으로 남겼다는데 역사적으로 의미가 있으며, 춘천의병 초기에 있었던 유일한 의병가로서 여성의병활동을 한 선비아내의 작품으로서도 훌륭한 가치와 의병정신을 고취하고 의병에 참여토록 권유와 독려하였다. 왜적에 대하여 경고·규탄·성 토·회유 등의 함축된 내용도 포함하고 있어 크나 큰 역사적 의의를 찾을 수 있다.

2) 윤희순 여성의병장 해외항일운동

윤희순 여성의병장의 해외에서 항일투쟁은 시아버지 유홍석의 춘천지역 의병활동이 일본의 병탄으로 국권이 상실되자 가족과 종족·사우들과 함께 요동지역으로 망명하여 해외에서 본토진공의 방략을 모색해 항일 의병투쟁을 계획하면서 시작되었다.
그러나 만주에서 계속하려던 항일운동은 외당 유홍석의 타계로 일단 어려움을 겪었으 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구국정신은 곧바로 자손에게 계승하여 장자 유제원의 의병 활동으로 이어졌다. 윤희순도 남편 유제원과 함께 항일투쟁을 하였으나 1915년 유제원 이 독립운동을 꾀하다 회인현에서 세상을 떠나게 된다. 그러자 윤희순은 아들 삼형제 敦相(瑛植)·敏相(瑃植)·敎相(?植) 등과 애국동지 180여명을 규합하여 독립단을 조직하여 활동케 하였으며, 큰아들 돈상은 중국 무순(撫順)에서 애국청년단원들을 교육하던 중 왜 병 수 십명의 급습으로 장인 음성국(陰聖國)과 함께 일경에 잡혀 모진 고문 끝에 어린 외아들 유연익(현 광복회 강원도지부장)만 남기고 1935년 7월 19일 순국하였다.
해외에서의 윤희순은 시아버님과 남편 아들의 항일투쟁을 뒤에서 온갖 어려움에도 불 구하고 3대에 걸쳐 의병활동과 독립운동을 지원하였으나 가족을 차례로 사별하고 아들 돈상(영식)마저 옥사하자 이국 땅 요동에서 「자손에게 훈계하는 글」과 「해주윤씨 일 생록」을 남긴 채 1935년 음력 8월 1일 76세로 일생을 마쳤다.
이와 같이 여성의병장 윤희순의 해외에서 항일투쟁과 독립운동 등 모든 활동은 강원 춘천여성의 대표적 인물로서 공·맹의 사상과 화서 이항로의 존양위척사상과 실천윤리의 식을 직접 행동으로 보여주었던 '見危授命'과 '捨生取義'의 절의정신에서 비롯된 현실참 여였음을 알 수 있다.
특히 해외에서 여성으로서 흔치않은 항일의병활동과 독립운동에 있어서도 중추적 역 할을 담당하였던 윤희순은 孝·忠과 仁·義·禮·智·信을 고루 갖춘 춘천의병장의 며느리이며, 춘천의병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남편 유제원의 아내였고, 해외에서도 '대한독립단(大韓獨立團)'에 적극 참여토록 권유하여 항일독립운동에 앞장섰던 세 아들 돈상(영식)·민상 (춘식)·교상(황식)의 훌륭한 어머니로서 만주에서의 의병활동과 대한독립단의 뒷바라지 로 끊임없이 항일투쟁을 하였던 춘천의 여성의병장이었다.
정부에서는 윤희순의 의병활동과 해외에 있어서 독립운동 등 항일 구국활동의 공훈을 기리어 1986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으며, 1991년에는 훈격을 건국훈장 애족장으로 승 격시켜 다시 추서하였다.
윤희순 여성의병장의 유해는 1994년 그의 손자 유연익 광복회 강원도지부장에 의해 발굴되어 대한민국정부 주관으로 중국 遼寧省 海城市 苗官屯 北山에서 고국으로 봉환되 었으며, 1994년 10월 20일 강원도 도민장으로 춘천시 남면 관천리 선영에 안장되었다.


3)윤희순 여성의병장의 성격

춘천여성의 전·후기 항일의병 활동과 역할의 성격은 일본제국의 침략이라는 망국의 위기로부터 국권을 회복시키기 위해 온 국민이 힘을 모아야만 했던 시기에 국가를 위한 국권회복의 구국운동이었다. 특히 항일의병투쟁에 적극적으로 활동하였던 윤희순 여성 의병장은 여성민족운동의 선구자였다.
일본의 한국 침략행위를 완강하게 저항해 온 고종이 외세의 강요에 퇴위당하는 절박 한 역사적 상황에 처하여 있었던 시기, 춘천의병에서 여성 부녀자들이 지녔던 국가의식 과 민족의식이 크게 높아져 애국애족의 구국적 애국사상과 남녀평등의식이 성장하여 의 병항쟁과 항일독립운동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일반적으로 조선시대 양반이라는 신분제약과 부계사회중심 시대에 있어서 문헌에는 부녀자의 이름도 없이 택호나 성만 사용하여 적혀 있듯이 봉건적 여성규제라는 사회적 상황 속에서 일생을 살다 간 여성의병장 윤희순를 비롯한 수많은 안사람들은 개인적인 안위와 가족의 생사를 민족과 국가의 운명과 일치시켰으며, 특히 윤희순의 경우 당시 전통적 사회의 통념으로는 도저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한계성에도 불구하고 여성들의 활동이 역사의 전면에 드러난 여성의병장으로 까지 나섰던 것이다.
강원여성들의 항일의병투쟁 참여는 가부장적 사회에 있어서 가장의 생각이나 명령에 의하여 참여하는 것이 아니라, 부녀자들이 스스로 자발적이며 독자적으로 그리고 여성 자신이 소유물을 가지고 한국인으로서 당당하게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것이다. 강원의 춘천여성으로서 항일의병 투쟁활동은 한국근대여성운동으로 확고한 의지와 더불어 과거 를 돌아보고 미래를 내다볼 줄 아는 통찰력있는 역사의식과 미래관을 확대시켜 역량적 기초의 틀을 발전시킬 수 있었다.
한편, 강원여성으로서 윤희순 여성의병장의 항일의병활동은 최초의 여성의병활동 단 체였다고 할 수 있으며, 이들은 안사람 의병단으로서 이들 구성원들은 대부분 화서학파 유생부인이며, 선비의 아내로서 화서의 여성교육에서 알 수 있듯이 여성도 배우면 선비 가 되고, 선비가 되면 국가와 민족을 위해 헌신해야 한다는 교육리념 속에서 어떤 처지 와 조건에도 '見危授命'·'捨生取義'·'殺身成仁'의 민족정신으로 나라사랑을 위하여 헌신하 고, 지혜를 모아 '愛君如父'·'憂國如家'라는 화서 이항로의 민족주의사상에서 비롯된 애 국애족 실천운동의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또한 윤희순 여성의병장과 춘천지역 여성의 항일의병 참여활동은 애국애족의식을 높 이 발양했을 뿐만 아니라 전국민에게 민족적 각성과 항일·호국의식을 크게 고취시켰고, 반침략 민족운동을 무장항쟁으로 발전시켰으며, 일본 수비대와 관군에 막대한 손실과 타격을 주어 일본의 한국에 대한 완전식민지로서의 강점을 약 2∼3년 지연시키는데 일 정한 공헌을 하였다.
이와 같은 점에서 윤희순 여성의병장과 춘천여성의 항일의병활동은 한국여성사에 커 다란 역사적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었으며, 이러한 여성들의 활동은 국가적 차원에서는 여성의 독자성과 독립성에 도움이 되었다. 이와 같이 개항전후기의 여성들은 일제의 식 민주의, 유교적인 가부장제의 제약 및 규제 속에서 민족차별과 성차별을 극복하며 애국 사상과 구국운동 등 사회활동을 펼쳐 오늘날 여성의 지위향상과 21세기 미래 한국사회 발전에 이바지 할 수 있는 바탕을 마련하게 된 것이다.
강원여성운동의 전통은 춘천지역 항일 여성의병 투쟁을 거쳐 3·1독립운동으로 끊임없 이 이어지는 한민족의 자존·자주·자고·자립의 독립운동을 펼쳐나갔던 것이다. 그러므로 강원도에서는 2000년 8월의 자랑스런 강원문화인물로 국가를 위하여 뚜렷한 의지를 실 천한 윤희순 여성의병장을 선정하여 강원의 독립운동가로서 나라사랑 실천에 헌신한 지 혜로운 강원여성으로 선양사업을 전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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